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상구 변호사 Oct 18. 2017

010 인간은 존엄한가

(2016년 6월 27일 칼럼 기고분)

[표지 : 'The Gates of Hell'  - Rodin]



의문


헌법 제10조 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언론보도를 접하다 보면, 잔인한 살인과 사체 훼손, 장기매매, 인신매매, 장난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학교폭력, 섬마을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성범죄 등등... 정말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한 듯한 사람들의 얘기들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으로서의 인간 존엄'과 '현실에서의 인간상'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들...
누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했는가요? 
누가 인간이 존엄하다고 했는가요? 



억압과 전쟁 중에 휘날리던 '인간 존엄'의 깃발


우선 헌법사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논의가 나온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전에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왕과 귀족이 다르고, 평민과 노비도 다른 인간입니다. 

평등할 수가 없었지요. 노비는 네발짐승만도 못한 가격으로 사고 팔렸고, 그들이 주인에게 존엄을 말하는 것은 인간이 신에 대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대의 현자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양반들도, 똑똑한 철학자들이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철인(哲人) 정치를 주장하든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은 중우(衆愚) 정치라고 비판하기도 했었지요. 

결국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존엄(dignity)이 인정되는 인간은 상층의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축적을 기초로 한 시민계층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 개념이기도 하지만 자원 분배에 관한 시민통제의 경제사이기도 합니다)

귀족보다도 더 잘 사는 평민이 등장하고 그들의 말발이 사회에 먹혀 들어가는데, 이러한 광경을 위에서 보고 있자니 ‘노란 싹수는 빨리 쳐내야 한다’고 짓밟았다가 오히려 된통 당한 것이 시민혁명의 역사입니다.

이때 시민계층이 이념적인 기초로 삼았던 ‘신 앞의 평등’, 즉 '너희들만 존엄하냐? 우리도 존엄하다.'는 생각이 인간의 존엄성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물질만능주의, 제국주의가 만연했는데 그러다 폭발한 것이 나치․파쇼 등 군국주의의 등장과 제1, 2차 세계대전이었고, 그로 인해 전쟁, 대량학살, 강제노역과 폭력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에 인류는 그와 같은 비인권적이고도 극단적인 역사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사회의 핵심가치로 두었던 것입니다. 



존엄의 조건


종교의 계율은 물론 속세의 법에서도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밝히고 있으며, 인류 보편적 의미에서 인간이 존엄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이란 명제는 사사로운 일상을 초월하여 구조적인 억압과 전쟁이란 다소 극단적인 상황에서 대두되었으므로 인면수심의 사람들에게도 일단은 유효합니다. 


다만 내가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받음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존엄', '사회의 기본가치' 또한 중요한 것이므로 내가 무인도에 혼자 살지 않는 한 나의 존엄성만이 본질적 가치로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에 학계에서는 존엄성이 인정되는 인간은 '사회공동체 속의 인간'을 의미하므로 그에 따른 내재적 한계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서 스스로가 '존엄한 인간'임을 포기한 자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선에서 그 존엄의 기초되는 부수적인 조건들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존엄성을 심히 해친 자라면 사안에 따라 그 목을 치진 않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통해 피묻은 손을 칠 수 있습니다. 즉 존엄은 존중받을 권리이기도 하지만 인간 스스로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하여 그에 걸맞게 행위하지 않을 경우 그에 합당한 사회적 제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삼장법사가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서역으로 가는 길에 많은 요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요괴들 중에서도 일부는 구제되고 일부는 물리쳐집니다. 

죄인 중 몇몇은 신의 자녀로 거듭나 구원받는다고 하나 상당수는 상상 속의 지옥에서라도 죄가를 치러야 합니다. 

존엄을 포기한 자에게 그 존엄을 각성시켜 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악을 증오하면서도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주제, 짧게 나마 떠오르는 단상들을 적어보았는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글 하나를 소개해 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깊은 사색의 노력 없이 단순 소박 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려는 노력을 하는 단순 소박 한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기만을 감행해가며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기만 없이 낙천적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도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쉽다. 
그러나 원한 없이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악과 부정과 비열을 간절히 증오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서준식, 고뇌 속에 떠오르는 희망 中> 


매거진의 이전글 009 생명권과 사형제도 존폐 논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