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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Oct 23. 2017

105 정당방위

(2012년 10월 29일 칼럼 기고분)

악덕 대부업체의 오더를 받은 조폭 A가 자영업자 B를 찾아가 ‘빌려간 1000만 원이 1억이 되었다. 좋게 이야기할 때 내놔라.’며 카터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일반인에게 법을 논하라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말이 있지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 말이 A에게는 ‘내 말 잘 들어라. 주먹이 곧 법이다’라고 읽히기도 하고, 

B에게는 ‘정(正)은 부정(不正)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 긴급상황에서는 주먹이라도 휘둘러 봐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읽히기도 합니다. 


이렇듯 폭력은 때에 따라서 '법을 무시한 위협의 수단'으로, 또는 '긴급상황의 방어수단'으로도 쓰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후자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 즉 정당방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당방위는 인간의 보호본능에 근거한 것으로서 거의 모든 시대를 관통하여 인정되어 왔는데, 학문적으로 체계가 잡힌 것은 19세기 바이에른주 법무장관이기도였던 포이에르바하(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저서 <독일 일반 형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공권력에 의한 보호가 불가능한 경우, 자기 또는 타인의 권리에 대한 부당하고 절박한 침해에 대하여, 시민이 사력으로써 방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법익침해는 정당방위로서 범죄가 아니다. 다만, 그 침해는 피침해자에 의하여 초래된 것이 아니어야 하며, 일정한 법적 한계를 벗어나면 부당한 과잉방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21세기의 형법 교과서에도 대동소이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최근 판례에서는 일반 사인의 침해행위에 대한 방어뿐 아니라 불법연행, 체포 등 부당한 공무집행에 대한 항거까지도 정당방위의 범주에 포섭시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습니다(대법원 1999. 12. 28. 선고 98도138 판결, 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1도300 판결).     


[사례 1 - 싸움] 싸움은 공격과 방어가 교차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 부당한 침해를 당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 방어가 방위 의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공격 의사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아 정당방위나 과잉방위가 성립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3도4934 판결).

다만, 일방이 싸움을 중지하려고 중지 의사를 밝혔음에도 상대방이 재차 공격해 오거나, 상대방이 격투 도중 갑자기 흉기를 사용하는 등  예상할 수 없는 범위를 넘는 공격수단을 사용한 때에는 정당방위가 성립될 수도 있습니다(대법원 1968. 5. 7. 선고 68도370 판결).     


[사례 2 - 계부 살해사건] ‘나는 인간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 12세 때부터 검찰간부인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후 계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받아온 B양이 남자 친구 J군과 함께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의붓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이를 강도사건으로 은폐하려 했던 속칭 ‘계부 살해사건’에서, 대법원은 ‘침해의 현재성’에 대한 판단은 명확히 하지 않은 채 ‘긴급 방위 상황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상당성을 결여하였다’는 이유로 살인죄를 인정하였습니다(대법원 1992. 12. 22. 선고 92도2540 판결).

다만, 항소심 법원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B양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집행유예형을 선고했었습니다.       


[사례 3 - 혀 절단사건] 지난 2012년 6월 어느 새벽, A녀(23세)는 술을 마시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같이 술을 마셔주겠다는 기사 B남(54세)의 제안을 받아 횟집은 물론 B남의 집으로까지 자리를 옮겨 새벽 6시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도중 A녀는 성폭행의 위협을 느껴 B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문을 잠갔음에도 B남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A녀에게 키스하고 성폭행하려 하자 A녀가 B남의 혀를 깨물어 절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의정부지검은 B 남을 강간(미수)치상죄로 기소하였지만, 이에 반하여 A녀에 대해서는 검찰시민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하여 "상해의 정도가 가볍지 않지만 혀를 깨문 것이 피해자가 처했던 위험에 비해 과도한 대항이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불기소 처분하였습니다.

이쯤에서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떠오르는 사건이 있으실 겁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던 ‘안동 주부 사건’입니다(대법원 1989. 8. 8. 선고 89도358 판결). ‘혀 절단’이란 결과도 비슷하고, 피해자의 행실에 과실이 있어 보이는 점도 비슷합니다. 위 사건에서도 안동 주부 W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과잉방위가 아닌 정당방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정당방위’는 법학의 기초이론이자 난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를 ‘정’으로 보고 누구를 ‘부정’으로 볼 것이냐?>, <예방적, 선제적 방어는 가능하냐?>, <어디까지가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범위냐?> 등이 그것입니다. 


정당방위의 이념은 정치적 의미의 ‘저항권’이나, 국제법상의 ‘자위권’과도 맥락을 같이 하므로 유심히 살펴보면 유익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시다 보면 법학의 다양한 국면들을 접하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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