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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Oct 28. 2017

018 할머니의 유모차

(2010년 05월 21일 칼럼 기고분)

[표지 출처 :  중앙일보 <조용철의 마음풍경>]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맞이해 고향에 계신 부모님, 조부모님을 떠올리게 하는 두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제목은 두 편 모두 ‘할머니의 유모차’입니다.


우선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제목: 너에게 묻는다)로 유명한 ‘안도현’님의 시를 보겠습니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가고 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아기도 젖병도 없이
손가방 하나 달랑 태우고 가고 있다.
이 유모차를 타던 아기는
올봄에 벌써 1학년이 되었다.
아기 손목이 굵어지는 동안
할머니 손등은 더 쪼글쪼글해지고
아기 종아리가 통통 해지는 동안
할머니의 키는 더 작아졌다.

오늘은 유모차가
할머니를 모시고 가고 있다.


다음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계신 ‘김회자’님[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의 시를 보겠습니다. 위 시보다는 좀 더 삶의 힘겨움이 묻어난 듯한 느낌입니다.


구순쯤 되신 할머니가 간다.
허름한 유모차에 종이박스를 싣고
구부정한 허리에
종일 모은 종이박스를 고물상에 팔고
썩은 나무뿌리 같은 손에 이천 원이 쥐어졌다.

라면 두 봉지를 사고
종이박스를 실었던 유모차에
남편인 듯한 할아버지를 태우고 간다.

한 세기가 집으로 가고 있다.


시골이든 도심의 한구석이든, 아기도 없는 낡은 유모차에 폐지나 잡동사니를 싣고 다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누구나 한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내 할머니 같고 내 어머니 같아 가슴이 찡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유모차’가 노년의 길잡이와 기댈 곳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시인들의 시상을 자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을 위해 봉사하실 훌륭한 후보자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바람’이라 하던가요. 세종시, 4대강, 북풍(천안함), 노풍(노무현)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위 두 편의 시를 접했을 때 드는 생각은 그 어떤 바람보다도 우리 맘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얼마 전 충청남도선거관리위원회에서 ‘후보자 토론회’를 위한 의제 선정 작업에 들어가면서 전문가들은 다음의 역영 별 의제를 올렸습니다. 첫째, 지역경제와 관련해 ① 관광자원 육성, ② 농업선진화, ③ 고령자, 청년, 장애인 등에 대한 일자리 창출, ④ 시군별 특정 산업 집중 육성전략, ⑤ 소상공인 및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문제를 중요한 이슈로 잡았고, 둘째, 정치행정과 관련 ① 도청이전에 따른 대책, ② 도내 지역 수준 양극화 현황에 대한 대책, ③ 세종시 문제, ④ 행정의 시민참여 확대, ⑤ 공직자 부패방지를 중요한 이슈로 잡았습니다. 기타 쟁점으로 충남교육의 질적 향상과 타 지역 인재 유출 방지, 무상급식, 다문화가정 지원방안, 금강유역 4대강 문제, 태안 유류오염피해의 후유증 등을 꼽고 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서 폐지를 줍는 일로 용돈을 마련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무엇보다 ‘고령자에 대한 생계보장과 일자리 창출’이란 제도적인 문제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요.


몇몇 뜻있는 지방자치단체나 시민단체에서는 중고 유모차를 기증받아 수리한 다음 지역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운동을 벌이고 있고, 이미 유모차를 끌고 다니시는 할머니들에겐 가지고 계신 유모차를 무상 수리해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한결 수월하게 장도 보고 마실도 다니고, 자식들에게 줄 산나물도 뜯어다가 실어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할머니들을 위해 유모차를 수리하던 젊은이에게 묻습니다.

“왜 유모차 앞에 벽돌을 달아놓는 건가요?”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유모차가 너무 가벼우면 지탱이 되지 않아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벽돌을 두 장 정도 달아 달라고 하셔서요.”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의 답은 ‘벽돌 두 장’에 달려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누가 백성의 편에 서있고, 누구의 마음이 좀 더 진실된 세심함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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