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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Oct 28. 2017

128 존엄사

(2008년 12월 19일 칼럼 기고분)


#1. 미국 플로리다 출신의 ‘테리 시아보’는 식물인간이 된 1990년 이후 15년 만인 2005년에야 비로소 법원의 판결을 통해 급식 튜브를 제거했습니다.


#2. 서울서부지방법원은 2008년 11월 28일, 식물인간이 된 76세 모친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게 해 달라며 자녀들이 모친을 대리하여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소송’에서 일종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의 요지는 “환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지 생명을 유지할지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바, 식물인간과 같이 그 의사 확인이 어려운 경우에는 사전 의사표시, 가치관, 종교관, 가족과의 친밀도, 나이, 기대생존기간, 환자의 상태 등을 고려해 환자의 치료 중단 의사가 추정되는 경우 병원에서는 환자에 대하여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엄사 논의의 등장 배경


‘존엄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 의학적으로 최선의 치료를 다했으나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더 이상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사’의 문턱에 있는 것이 ‘존엄사’ 문제이지요. 존엄사는 의학기술의 발달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의학의 발전으로 식물인간 또는 회복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의 경우에도 환자의 몸에 기계장치를 하고 호스 등을 꼽으면 심장이 뛰고, 폐가 움직이며, 영양분까지도 공급할 수 있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작용은 기계로 대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실제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육신에 기계장치를 연결하여 호흡이 달려 있는 관계로 영혼은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실낱같은 줄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형상이랄까요.

이에 환자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여 시신과 다를 바 없고,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자꾸 꿈속에서 ‘아가야, 나 이제 돌아가려 한다. 이제 그만 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이 줄을 놓아주면 안 되겠니.’하는 음성이 들리는 상황인 것이죠.  



소극적 안락사, 존엄사의 허용


간혹 혼동할 수 있겠지만 ‘존엄사’와 구별해야 될 개념으로 ‘안락사’란 것이 있는데, 이는 사기(死期)에 임박한 환자의 극심한 고통 제거 등을 목적으로 자연적인 죽음의 시기를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크게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뉩니다.


①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해서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로, 다수의 국가에서 살인 또는 자살방조죄 등으로 처벌하고 있는 반면, 네덜란드 등지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② 반면, 생명유지 장치의 제거 등을 통한 ‘소극적 안락사’는 대다수의 국가에서 엄격한 요건 하에 허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개념상 ‘존엄사’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이에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사전 의사결정을 통해 환자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시행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었고, 1980년 로마 교황청에서도 존엄사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계, 법조계,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허용 여부 및 합리적인 기준 마련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


하지만, 1997년 소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료계는 ‘연명치료 중단’이란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몸을 사려왔습니다. ‘보라매병원 사건’이란 환자의 가족이 수술비 부족 등을 구실로 의사에게 환자의 치료 중단을 요구해 의사가 퇴원시켜주었다가 결국 집에서 환자가 사망하게 됨으로써 가족에게는 ‘살인죄’, 주치의 등에게는 ‘살인방조죄’를 선고한 사건이었는데, 사실 내막을 살펴보면 가족들이 환자에게 앙심을 품고 치료 중단을 요구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1심 :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1998. 5. 15. 선고 98고합9 판결, 2심 : 서울고법 2002. 2. 7. 선고 98노1310 판결, 3심 : 대법원 2004. 6. 24. 선고 2002도995 판결).


위 사건 이전에도 의료계는 관행적으로 사기에 임박한 경우 연명치료 중단을 시행하기도 했었는데, ‘보라매병원 사건’이 터지자 ‘잘못했다가는 살인방조죄로 쇠고랑 찰 수도 있다’는 생각에 뜨끔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환자 보호자들이 ‘퇴원시켜달라. 계약은 해지됐다.’ 하는데, 병원이 ‘생명은 소중하니 연명치료는 계속되어야 한다. 돈은 우리가 다 부담하겠다’고 하기도 쉽지 않구요. 그래서 병원은 차선책으로 환자로부터 사전에 ‘소생술 거부 서약’을 받은 경우에 국한하여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해 오곤 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사전에 환자의 명시적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 중단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연명장치 제거를 인정할 수 있다는 금번 판결(김 할머니 사건 1심 : 서울서부지방법원 2008. 11. 28. 선고 2008가합6977 판결)로 인해 의료계는 연명치료중단으로 인한 형사책임문제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중한 논의


이렇듯 세속의 재판관은 일정한 요건하에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긍정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가치라기보다는 세속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 가치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어느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라고 볼 것인지', '환자가 사전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의식의 회복 가능성을 상실했을 때 가족의 동의나 환자의 추정적 의사만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할 것인지', 더 나아가 '신이 부여한 생명을 인간의 자기결정권 문제로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중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코멘트]


1) 김 할머니 사건은 서울서부지방법원 2008. 11. 28. 선고 2008가합6977 판결, 서울고법 2009. 2. 10. 선고 2008나116869 판결, 대법원 2009. 5. 21. 선고 2009다17417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법원 판결 이후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국내 첫 존엄사가 시행되었는데, 당시 김 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한 지 201일 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2) 보건복지부는 2013. 11. 28.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급속도로 악화하는 임종기 환자’를 대상으로, 환자의 명시적 의사표시, 의사표시 추정, 대리 결정에 따라 임종을 앞둔 환자의 특수연명치료(인공호흡기·심폐소생술·혈액투석·항암제 투여)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연명의료결정법 초안’을 내놓았고, 2016. 2. 3. 정식 명칭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로 제정 공포되어 주요 규정들은 오는 2018. 2. 4.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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