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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May 01. 2024

이방인의 뉴욕뉴욕 III

이방인의 관광객 모드


Day 3.


시차 덕에 또 보게 된 일출. 오늘의 일정은 뉴욕 현대 미술관이다.


뉴욕의 지하철 노선은 한국의 1-9호선처럼 알파벳 순서로 표기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디스트릭트 등 이름으로 된 노선이 처음엔 복잡해도 보기 좋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간단하게 표기된 노선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편리했다. 그래봤자 서울 살던 사람에겐 언제까지나 주황색 노선은 3호선, 초록색 노선은 2호선이 될 뿐이지만.


MoMA 맞은편 공공도서관에서는 한국어로 하는 한국어 북클럽이 진행 중이었다. 최근 들어 약간 주춤한 편이긴 하지만 런던에서 여전히 유행 같았던 한류를 미국에서 접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 어서 더 널리 퍼뜨려져서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도록 하자.



비싼 티켓값만큼 거대한 미술관, MoMA.

수많은 미술관 후기들이 시킨대로 위층부터 차례대로 감상했는데 한층한층 내려갈수록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메레 오펜하임이나 반 고흐 등 한번쯤 이름을 들어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상층 언저리에 위치해 있어 덕분에 체력이 달리기 전 쌩쌩한 관찰력으로 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하루에 모든 걸 볼 수는 없으니 지쳐 나가 떨어지기 전에 유명한 작품을 보라는 유용한 선배들의 말씀.


먹고 체할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같은 생각이 곱씹혔다. 모두가 무료로 한정된 예술을 누리는 것과 한정된 일부가 양질의 예술을 더 풍부하게 누리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은 것일지. 공공의 즐거움과 일부만의 더 나은 즐거움 사이에 금액을 매긴다면 그 가치는 어떻게 정할 수 있는지.

런던에서 왔기에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물론 런던에도 유료 갤러리가 많고 국립미술관의 규모도 크지만 예술의 민주화를 꿈꾸는 런던과 예술 자체가 자본주의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뉴욕 사이에서 큰 괴리가 느껴졌다.



이런 비판적인 생각이 드는 중에도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관람객의 감상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짜여진 거대한 공간에서 그 공간을 마음껏 누리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아이용 갤러리텍스트가 붙어 있는 작품들도 있었는데 아이뿐 아니라 성인도 작품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질문들이 많았다.

런던에서 미술관을 자주 들르게 되면서 알게 된 내 취향은 점묘화였다. 이번 MoMA에서도 작품을 앞에 두고 천천히 뒤로 걸어가다 점점이 박힌 색깔들이 갑자기 합쳐질 때의 카타르시스가 너무 좋았다. 


후달리는 정신에 대충 둘러 보면서도 마지막까지 기억에 깊게 남은 것 중 하나는 과거의 사람들이 상상했던 미래의 도시들이었다.

학창시절 SF 그림 그리기의 단골 소재였던 해저도시. 오래된 상상력의 흔적이 마치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다.



더 이상 즐기면서 못 보겠다 싶을 때쯤 이제 그만하자며 서둘러 나오니 벌써 도시에 이내가 앉아 있었다. 지치고 배고픈 중 가려고 했던 중국집을 못 찾아 얼떨결에 파이브가이즈로 들어갔다.

뉴욕에서 먹는 파이브가이즈라니!

매장에 보통 서너 명이 있는 런던과 다르게 카운터 뒤가 북적북적했고 하나같이 흑인들이었다. 주문 하나 하는데 무슨 스몰톡을 그렇게 길게 하는지 억양이 뚜렷했고 캣콜링이 심했지만 런던에서 먹던 것보다 세 배는 더 맛있었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 정말로 케빈의 크리스마스를 보러 가야 한다.

다행히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았고 런던의 도떼기를 각오했는데 거리 폭이 커서 그런지 휴가철에도 예상 외로 거리도 많이 북적이지 않았다. 여유로웠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저 평일이라 덜 그랬던 듯하다.

분명 서울 빌딩숲이 지겨워 런던으로 떠난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비슷한 빌딩숲을 마주하니 오히려 감탄스러운 게 간사하다 싶었다. 동시에 쉽게 감동받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


가는 길에 런던 소호에서는 거들떠도 안 봤던 M&M과 레고샵을 뉴욕에 와서야 가 보게 됐다. 왜 진작 안 갔을지? 자본주의 너무 재밌었다. 여신이랍시고 레고에마저 속눈썹이나 립스틱을 발라둔 게 슬프긴 했지만 Liberty statue 핫도그 인간 레고도 웃겼고 벽면에는 고스트 버스터즈 같은 영화 속 뉴욕 장면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록펠러 센터.

진짜 케빈의 크리스마스 바로 맞은 편에는 SAKS LIGHT가 빛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규모였다. 화려한 색감에 넋 잃고 구경하다가 뒤로 돌면 비교적 고요해 보이는 트리가 얼음 위에서 반짝였다. 낭만에 감동받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트리 밑의 아이스링크가 낭만적이었다.


거리에 사람이 적더니 이곳에 다 몰려 있었다. 이번엔 명동처럼 줄지어 사람들이 빠져 나갔다. 케빈을 봤으면 타임스퀘어를 봐야 한다. 타임스퀘어로 이어지는 대로로 진입하니 온 세상이 번쩍번쩍해지기 시작했다.

투나잇 쇼가 생방으로 진행되는 방송국부터 라디오시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들과 가만히 보기만 해도 도파민이 도는 상업주의의 현장.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앤줄리엣이다. 런던에서 너무 재밌게 봤던 터라 브로드웨이에서 마침 하길래 예약했는데 시간이 조금 떴다.

그래서 들어간 디즈니 스토어, 최근 개봉했던 위시 MD로 가득했다. 영화를 너무 게으르게 만들어 놔 실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MD는 다양하게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극장 도착 5분 거리에서도 알 수 있게 여기가 바로 OO 공연을 하는 극장입니다 하고 소리치는 듯한 웨스트엔드와 달리 브로드웨이는 극장들이 좀더 으슥하고 힙한 클럽 같다. 하마터면 못 찾고 지나칠 뻔 했다.



뉴욕에서 다시 본 앤줄리엣은 더 밝고 더 콘서트 같았다.

흐름은 똑같지만 대사나 바이브가 은근히 꽤 달랐다. 코미디나 감정 연출 면에서 런던이 더 좋기도 했지만 메이 역이 미디어식 여성성을 너무 강조하고 있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인싸의 나라답게 노래 한 곡 한 곡의 느낌은 뉴욕이 훨씬 더 잘 살려진 느낌.


뉴욕 극장에서 정말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공연 관련 책자를 나눠주는 것.

덕분에 좋아하는 뮤지컬인데도 새로운 정보를 제법 많이 알게 됐다. 심지어 오늘 출연진 중 한국인 배우가 있다는 사실. 일면식 없는 남인데도 해외에서 빛나는 한국인을 보면 왜 반갑고 자랑스러운지. 앤줄리엣은 미국적인 색채가 강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맨체스터에서 시작된 뮤지컬이었다.


첫사랑은 못 잊는다고 여전히 첫 줄리엣이 그립지만 재밌게 잘 보고 왔다.



분명히 널널하게 짰는데 어쩐지 일정이 계속 빡빡하다.

뮤지컬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허쉬의 문이 열려 있길래 이대로 가기 아쉬워 잠시 들렀다. 맛있는 자본주의. 들어가자마자 손님들에게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줬다. 초콜릿향 캔들은 작은 사이즈만 있었어도 나와 함께 집으로 갔을텐데.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오니 제대로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카카오톡이 느려 답답했는데 미국에서 유난히 느린 느낌을 받았던 것이 기분이 아니라 서버 때문에 정말 느린 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뉴욕에서 하는 카카오 디톡스, 조금 번거롭지만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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