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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May 15. 2024

이방인의 뉴욕뉴욕 IV

이방인의 관광객 모드 - 9/11 기념관

Day 4.


얼떨결에 또 본 일출.


느긋한 여행 지향자인데 아직 뉴욕에 온지 72시간도 채 안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온갖 핫플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맨해튼 덕에 옹골찬 여행 중.


시나몬 토스트 크런치는 드시고 피스타치오 넛밀크는 드시지 마세요


일어나자마자 아일랜드에서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여행 중이라 엽서를 못 보내는 대신 패드에 손글씨를 적어 카드를 보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든 아날로그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지.



자유의 신을 보러 가는 날, 뉴욕은 두 번째 방문이지만 전번 방문이 그랬듯 이번에도 어쩐지 큰 관심이 가지 않는 명소라 이번에도 간만 보기로 했다. 배를 타고 동상을 찍먹한 다음, 해변을 따라 산책한 후에 월스트리트 금융 지구를 지나 9/11 메모리얼을 보고 차이나타운까지 걸어가는 아름다운 동선이다.


선착장이 있는 역을 나오자마자 형광 조끼를 입은 온갖 호객꾼들이 달라붙어 페리가 있는 배로 안내해 주겠다며 말을 걸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배가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봐서 천천히 검색하며 걸어보려던 계획이 와장창 무너졌다.

너무 저돌적인 영업에 기가 질려 눈앞에 보이는 선착장으로 피하니 거기로 가면 리버티 동상 못 봐! 하며 졸졸 따라오기까지.

살려줘.


메이트가 우선 사람들이 저쪽으로 가고 있으니 나가서 따라나 가 보자 하길래 밑지는 셈 치고 선착장을 다시 나섰다. 친절하게 바닥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따라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된 유람선이었다. 결국 유람선 앞에 서서 다시 찾아 보니 좀전에 있던 선착장이 바로 Staten Island로 가는 무료 통근선이 출발하는 곳이었다.

그거 타야 돼. 돌아가.



배는 금방 출발했다. 오른쪽 난간에 자리 잡고 동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려니 얼마 안 가 세찬 바닷바람이 야멸차게 뺨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허드슨 강은 템즈 천이랑 차이가 크니까. 너무 추워서 웃음이 절로 났다.


통근 배라니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동상이 멀기는 했어도 제법 잘 보였다. 생각보다 전완근이 멋졌다. 역시 진정한 자유는 근력에서 나온다지요.



월가 황소를 보러 가는 길에 뉴욕 전쟁 기념관이 있었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이 흥미로웠던 런던 전쟁기념관이 떠올랐다. 다음 여행 때는 꼭 방문해 보기로.


런던에 처음 왔을 때 빨간 버스를 발견하기만 하면 느꼈던 희열이 뉴욕에서는 노란 스쿨버스를 볼 때마다 느껴졌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런 금융 지구에도 스쿨버스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이 서 있다 했더니 황소가 앞뒤로 고통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애타 하는데 불스 마켓은 어디쯤 왔니? 오고는 있니?


평화로운 여의도 같은 거리가 오로지 자본만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활발한 도시 같았던 분위기가 9/11 기념관 근처로 넘어오면서부터 바뀌었다. 물이 주룩주룩 내리며 통곡하고 있는 두 기념물에는 희생자들의 이름 위에 아직도 꽃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9/11 테러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기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직 테러의 끔찍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학교의 모두가 뉴스에서 본 비행기가 건물에 추돌한 사건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늠하지 못했던 초딩들의 눈에는 그저 영화처럼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추모 기념관이니 내부도 기념물이나 비석, 추모의 글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놨다.




희생자들의 목소리, 유품, 무너진 건물에 남았던 잔해와 먼지들, 이 모든 걸 다 수집하느라 설립하는 데 그 긴 기간이 걸렸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가 이해가 갈 만큼 눈앞에 맞닥뜨린 테러의 현실이 트라우마틱할 수 있을만큼 현실적이고 생생했다.


당시의 끔찍한 현장을 이렇게 가감없이 전시하며 높은 관람료를 받는다는 점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공간이었으니 어떤 면에서 진정한 추모의 완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좀더 자세히 보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았던 불편함이 있어 마지막에는 서둘러 나왔다.

시간이 조금 뜨면 브루클린 다리 일몰을 보고 갈까 했는데 이미 해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기념관 맞은편에는 호주 쇼핑몰 체인인 웨스트필드가 있다. 오큘러스라는 건물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는데 천사의 날개라는 의미라지만 내눈엔 그저 가시고기 같고 그것마저 슬프다.

내부에 소소하게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는데 마침 10년 전 아버지가 방문하셨을 때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진행 중이었던 때라 똑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왔다. 같은 유전자 다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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