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관광객 모드 - 미국 자연사 박물관
런던의 큰 지하철역들은 대부분 오래된 역에 신축 공간을 더하고 더해 미로 같은 반면, 뉴욕의 큰 지하철역은 뻥 뚫린 지하 통로 같다. 스파이더맨이 왜 뉴욕 출신인지 알 것만 같은 느낌. 저 정도 크기라면 거대한 도마뱀 괴물이 튀어나올 법하다.
런던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들은 런던 한인타운에 가서 한식당을 갔다는데 나는 뉴욕 차이나타운에 가서 중식당을 갔다. 굳이 따지자면 딤섬을 먹었으니 대만식당에 가깝지만. 역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주장 강한 차이나타운의 기운. 한자로 된 맥도날드 간판이 이곳이 차이나타운임을 인증하는 듯했다.
차이나타운 옆에 작게 자리잡은 리틀 이탈리는 미국에 처음 에스프레소를 소개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이름처럼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많다고 들었지만 밤이 늦었고 나의 위장은 하루 최대 세 끼 식사만 허용하기에 아쉽게 지나쳤다.
중국계 이민자들의 영향 덕인지 런던의 중식당도 한식이나 일식에 비해 고유의 맛을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인데 자본주의에 한 발짝 더 담근 뉴욕의 중식당은 비교가 안된다. 입 안에서 팡 터지는 육즙. 이게 진짜라고요.
아쉬움에 다시 돌아간 타임스퀘어.
여태까지의 평화는 그저 평일의 행운이었다는 것처럼 주말을 하루 앞둔 거리는 카오스 같았다. 전날보다 세 배는 더 붐비는 거리들. 마담 투소 같은 런던에서도 익숙했던 글자들이 더 크고 빛나며 나타났다. 눈이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화려함. 골목 한쪽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지만 뉴욕 자체의 휘황찬란함에 크리스마스조차 먹혀버린 것 같았다.
전날 한산해도 지나쳤던 바나나푸딩 가게에 긴 줄이 있는 오늘에서야 들어갔다. 이렇게 바쁜데 일일이 손님들과 들뜬 목소리로 활기찬 대화를 하는 점원들이 경이롭다. 복 많이 받으십쇼.
숙소에 돌아와보니 환경 문제로 요청해야만 넣어준다더니 요청해도 누락하는 영국과 달리 여분까지 같이 들어가 있는 숟가락들. 케이크 같은 푸딩이 컵 가득 꽉꽉 담겨 있었다. 자본주의는 정말 좋은 걸까, 나쁜 걸까.
Day 5.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네 번째 아침이 오니 이제는 해가 나보다 먼저 떠 있다.
드디어 공룡 보러 가는 날. 삼일 내리 도파민에 절여져 있었더니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지 컨디션이 훅 떨어진데다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지만 공룡은 못 참으니까요.
영국에서는 줘도 안 먹었던 핫도그를 굳이 찾아가 먹어봤다. 핫도그보다 파파야주스가 더 맛있었다면? 이제 뉴욕에서 핫도그 먹어본 사람이 되었다.
가는 길에 발견한 Gun-free zone 팻말. 새삼스레 내가 있는 이 곳이 총기 허용 국가라는 것이 와 닿았다. 그나저나 저렇게 팻말 붙여봤자 지나가는 행인 분이 gun-free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여담이지만 smoking-free나 gun-free를 한국인의 직관대로 받아들이면 흡연 자유, 총기 자유가 되지만 굳이 낱말의 의미를 넣어 해석하자면 '흡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총기로부터 자유로운'이 된다. 최근에는 유기농 제품에 보존제 free 등 문구가 많아지면서 의미가 잘 알려졌지만 여전히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금연 구역, 총기 금지 구역이니 혹시나 실수 않으시길.
건물부터 골격처럼 생긴 NMAH는 뉴욕 스니소니언 박물관 중 하나다. 자연사 스튜디오 같았던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비해 전시와 체험에 좀더 중점을 둬 더 박물관 같은 느낌이 강했다.
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의외로 지질관이 좋았다. 오묘하게 반짝거리는 커다란 광석이 신비로웠다. 저런 빛깔이 자연에서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경이롭다가도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은 모두 결국 자연을 모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류학관은 생각보다 더 좋았고 오히려 다윈의 나라 영국보다 훨씬 많은 자료를 담고 있었다. 너무 재밌다.
아쉬운 건 자료가 얼마나 자주 업데이트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는 점. 미국사에서 아메리카 대륙 발견한 시점의 유리관에 보일 듯 말듯한 글씨로 이 장면은 매우 성차별 및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구성되었으며 실제 사실과도 다르므로 곧 업데이트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붙어있던 글씨인지, 언제쯤 바뀔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해야 더 자극적인지 잘 아는 분들이 만든 듯한 공룡관 전시. 문 밖으로 나와 있는 공룡 머리를 마주할 때부터 심장이 뛴다. 특히 디플로도쿠스 속을 계통 분류부터 찬찬히 볼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불변의 내 최애였던 목 긴 용각류야.
아프리카관도 인상적이었는데 제 나름 동물의 왕국 애청자였는데도 듣도 보도 못했던 동물이 많았다. 처음 보는 영어 이름을 마주하고 검색해 보면 한글로도 알 수 없는 이름이 나오는 난감한 재미.
즐거웠던 체험과는 별개로 박물관 내 환기가 잘 되지 않고 이리 저리 몰려 다니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팠다. 관심도 없지만 끌려온 티가 여실하던 친구들을 보니 오만 년 전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지 말고 여기 조용히 좀 봐봐. 나중엔 재밌어진다고.
알고 보니 출입구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입장 인원이 많아서인지 보안도 줄도 훨씬 빡셌다. 힌츠홀처럼 대기줄 한복판에 화석을 세워두고 있었다. 저기서 기다릴 걸, 하고 앞에 기웃거리고 있으니 경비원이 들어갔다 와도 된다며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선생님도 복 받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