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관광객 모드
Day 1.
처음 타 본 버진 아틀란틱 항공사.
타자마자 승객들에게 뭘 자꾸 먹이길래 미국 항공사인가 했는데 구름 위의 애프터눈티라며 스콘이 나왔다. 영국 항공사였군요.
중간 자리라 창밖은 볼 수 없었지만 장거리 비행기라 그런지 바깥을 카메라로 볼 수 있었다. 뉴욕이 가까워질수록 화면 가득 밤을 밝히는 불빛이 환하게 들어차는데 대도시로 간다는 실감이 그제서야 났다.
적응이 무섭다고 지하철역 방향에 서브웨이로 안내된 게 어색했다. 10년을 지하철은 서브웨이라고 배웠는데 고작 1년 좀 넘게 살았다고 서브웨이가 혀 끝에서 덜컹거리는 게 웃겼다.
틴케이스 같은 '서브웨이'를 타고 숙소가 있는 롱아일랜드로 가는 길.
런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뉴욕도 열차가 종착역을 마음대로 바꾼다. 덕분에 3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가량 돌아 도착했다.
아시안들이 많이 산다는 롱아일랜드의 첫인상은 공덕역. 밤에도 환한 거리에 별 걸 다 파는 아시안 마트가 9시에도 영업을 하고 있었고 큼지막한 사거리 위로 지하철이 지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정겨웠다.
Day 2.
시차 덕분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일출과 함께 창밖 가득한 높은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lofi를 틀어놓고 뽀모도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폰이 영국보다 50만원 정도 싸다며 사고 싶다는 동행 덕에 런던에서도 안 가 본 애플 매장에 들렀다. 애플 매장은 다 그런 건지,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꾸며진 전시대가 어쩐지 미국 그 자체로 느껴졌다.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거리를 신나게 돌아다니다 아침거리를 사러 들른 카페. 한 손님이 주문하면서 "As usual." 이라길래 주민의 입맛을 믿고 먹어 보기로 했다.
뉴욕 베이글로 채우는 뉴욕의 첫 아침. 평소에 베이글을 즐기지 않는데도 너무 맛있었다. n년만에 드디어 이해하게 된 베이글파들의 마음.
요깃거리를 한 후에 소호로 출발했다. 한블록 한블록을 지날 때마다 분위기가 휙휙 달라졌다. 명품가 바로 다음 골목에서는 대마 냄새가 진동을 하고 그 구역을 벗어나면 다시 런던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대형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쇼핑몰이 나온다.
날 것의 느낌이 드는 거리를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 사이로 걷자니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겨울 들어 흐린 하늘만 주구장창 보다 파란 하늘을 마주해 그런지도 몰랐다. 런던만큼이나 성조기도 자주 보였는데 국기를 곳곳에 걸어두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새삼스레 우리나라에서 태극기가 이제는 마치 태극기 부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다른 여행지들처럼 느긋하게 걷는 일정을 짰는데 도시라 그런지 어쩐지 바쁜 느낌이 들었다.
걷다가 어릴 적 환상을 머금은 노란 스쿨 버스를 드디어 봤다. 그 때는 지금쯤이면 신기한 스쿨버스 같은 교통 수단이 나왔을 줄 알았는데 지금 내가 아는 건 미국 스쿨 버스는 방탄 재질이라는 것뿐이다.
거리를 걸으면 걸을수록 북경과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 났다. 컨테이너며 자동차며 어마무식하게 크다는 감탄이 툭하면 튀어 나왔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목표는 유니언 스퀘어의 크리스마스 마켓. 런던을 생각하고 3시 반쯤이면 해가 지겠거니 싶었는데 파란 하늘의 뉴욕은 해가 지기는커녕 여전히 짱짱한 하늘빛을 뽐내고 있었다.
딱히 큰 관심도 없는 세포라며 근처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열심히 시간을 때우다 멀리 건물에 오렌지빛이 드리워지는 걸 보고 드디어 광장으로 들어섰다.
가게에 늘어선 수공예품 질이 런던보다 훨씬 좋았다. 이게 자본주의의 맛인가요?
마음먹고 가도 도무지 지갑이 열리질 않는 런던 마켓과 반대로 아기자기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뜨개 소품이나 악세서리에 눈이 즐거웠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물건들은 잘 보이지 않아 크리스마스는 그저 자본주의에 이용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야외 음주가 금지된 나라답게 멀드 와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점도 여태까지 간 크리스마스 마켓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었다. 대신 핫초코에 마시멜로를 푹 녹여 팔았다. 당뇨병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걸 거리에서 버젓이 팔 수가?
구경하다 양 인형을 보고 반가워서 멈칫했는데 주인 아저씨가 일본인이었다. 심심하셨는지 몇 번이나 한국인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일본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으며 말을 끊지를 않아 눈치껏 자리를 떴다.
저희는 일분일초가 바쁜 관광객입니다.
마켓 한구석에서는 사람들이 작은 책상을 여러 군데 펴놓고 체스를 두고 있었다. 걸어 다녀도 추운 날씨에 빈 자리 하나 없이 다들 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열정이 부러웠다.
책으로 만든 시계나 풍자가 담긴 뱃지나 흥미로운 물건은 많았지만 크리스마스 마켓보다는 플리 마켓 같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 무렵 퍼즐 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런던 기념품 가게에서는 본 적 없는 해리포터 퍼즐이 있어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미국 내 제품만 만드는 라인도 따로 있다고 했다. 어떡해요 그럼, 사야지.
전반적으로 래스터 스퀘어보다 덜 붐비고 물건이 더 좋아 재미가 있었다. 너무 추웠던 것만 빼면.
마켓 천막 너머로 기후 시계 전광판이 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