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위대성은 그의 작업량이 아니라 작업의 성격에서 발견된다. 자칫 잡학적 호사 취미에 빠지기도 했던 다른 지식인들과는 달리 그는 한 가지 편집 원리로 경학과 경제의 핵심 주제들을 관통하는 작업을 해냈다. 그 저변에 깔린 정신은 위국 애민 네 글자뿐이었다. 그는 고리타분한 경학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실제의 쓰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작업했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연암 박지원에 몰두해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18세기의 새로운 지식경영에 대해 공부하다가 다산과 새롭게 만났다. 그의 글을 거듭 읽는 동안 나는 또 다른 한 세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연암은 높고 크고 다산은 넓고 깊다. 연암을 읽고 나면 오리무중의 안개 속으로 숨는데, 다산은 읽고 나면 미운을 걷어내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그저 베껴쓰기만 해도 수십 년이 걸릴 경집 232권과 문집 260여 권을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간 모두 정리해냈다. 참고할 서적도 넉넉지 않고, 여건도 여의치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이뤄낸, 경이롭다 못해 경악할 만한 성과였다. 굳건한 바탕 공부의 힘이 위기를 만나 오히려 위력적으로 발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