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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데레사 Apr 16. 2019

빚으로 지은 집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오래전부터 읽으려 했었지만 다른 책에 순위가 밀려 못 읽었던 책이었다. 이번에 금융 복지 상담사 교육 내용과 연관 지어 읽을 법해서 3일 만에 읽었다. 역시 의지가 문제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5016722

금융 복지 상담사가 받는 교육의 "금융"은 은행에서 파는 금융상품,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상 "대부" 즉 "빚"에 관한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다. 나도 처음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름 경영학과 졸업자로서 경제 용어나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스러운 부분을 상기했지만 강사님은 첫 시간에 아예 잘라 말씀하셨다. 교육 과정은 제도권 안과 밖에서의 "빚"의 메커니즘 속에서 자산이 없는 사람의 알량한 "부"가 현금자산을 많이 가지고 장사를 하는 채권자의 "부"에 어떻게 흘러들어 가는지 거시적인 안목을 제공하는 자리라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2014년 시카고대학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자세하게 다루었다.

Mortgage 죽음을 나타내는 라틴어 mor와  약속하다는 의미의 pledge를 합한 말이다.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채무. 사실 모골이 송연한 이 단어를 우리는 '신용'이라는 허울을 씌우고 아주  손쉽게 쓰고 있는 것이다.

금융 혁신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매우 위험한 증권을 안전하다고 꼬드겨서 투자자가 사게끔 하는 것이 은행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아티프 미안과 아미르 수피는 레버드 로스(levered losses)라는 경제모형으로 당시 미국의 대침체 시기의 경제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신용 팽창을 거듭하는 은행은 신용 등급이 낮은 자에게도 높은 금리를 책정하여 채권을 만들고 이를 트랜칭(쪼개고)과 풀링(섞고)을 통해 초우량 자산으로 둔갑시켜서 다시 금융시장에 되파는 역할을 했다. 미국의 경제는 종이 한 장 인 것 외에는 실체가 없는 이 채권이 거래되는 사이에 채무자가 재화 소비를 극적으로 줄이며 이 재화를 생산하는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기업은 정리해고를 하는 악순환이 집값 하락이 실현되는 순간 대침체의 끝 간 데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이 모델의 흥미로운 부분은 채권자의 손실분에 관한 의문이다. 집값이 떨어질 때 발생하는 손실은 순전히 채무자의 몫이고 채권자는 손실이 없다. 이렇게 채무자에게만 편중된 위험 부담과 채무의 고통은 관연 공평한 것인가? 부실 채권의 거래에 책임이 없는가? 그렇다고 해도 경제력도 없으면서 분에 넘치게 돈을 빌려 펑펑 쓴 사람이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이 의문을 붙잡고 저자는 5년의 기간 동안 자료와 통계를 모아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304페이지(한글 기준)에 담았다. 생산성이 떨어진 이유도 아닌데 갑자기 경제가 나락로 떨어진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며 말미에 채권자도 채무자의 고통을 분담하여 무용하고 맹목적인 채권 거래를 줄이고 채무자도 회생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더욱 건전한 경제활동을 하자는 의견을 냈다.

물론 이러한 급진적인 목소리를 우려하는 저자의 걱정이 없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신용팽창으로 인한 부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제도를 다른 각도로 돌아볼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부의 흐름을 이야기하다 보니 몇 년 전 신선하게 읽었던 "엔데의 유언"이 생각난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 돈이 갖는 본연의 문제는 돈 자체가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겁니다. 원래 등가 대상이어야 하는 돈 자체가 상품이 되어버린 것,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하엘 엔데는 교환의 수단이 되어야 할 돈이 그 자체로 거래가 되고 이윤을 창출하는 체제를 근원적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샀던 시금치는 얼마간 두면 썩어 나지만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치하는 사상으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 일 것이다. 하지만 엔데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근본적 사고는 정의 입니다.  (중략) 탄광 속에서 연일 일하고 일요일에만 땅 위로 나와 태양을 볼 수 있었다는 아이들도 있어 이들을 '일요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시간 상류계급 사람들은 살롱에서 문화적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고귀한 신사숙녀들은 그 살롱을 따뜻하게 해 준 석탄이 이 아이들의 가혹한 노동으로 얻어진 것임을 몰랐습니다.(중략) 그것을 비판한 것은 분명 옳습니다. 이는 역사에 남을 마르크스의 공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는 그것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중략) 마르크스의 최대 실수는 자본주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르크스가 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를 국가에 위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과거 70년 동안 채용한 민간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쌍둥이와 같았습니다. 둘 다 자본주의였지 별개의 시스템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부터 당장 아이들 간식을 살 돈이 필요하고 매달 내야 할 공과금과 통신비를 신경 쓰며 살다 보니 돈이 무엇이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왜 그런 모양으로 가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가끔은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이  자본의 탈을 쓰고 무리 지어 다니는 모양을 관조하는 책을 읽으면서 새삼 자본주의를 선연하게 보면 언젠가 나도 황금을 돌같이 무겁게 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런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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