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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푸근 Dec 28. 2016

나에게 기대지 마세요

버스에서 만난 인연

한 번은 버스를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좌석버스에 올라탄 나는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리를 찾았다. 남은 자리는 맨 앞 여성 한 분이 졸고 있는 옆자리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나는 음악의 리듬에 흥겨울 무렵, 갑자기 오른쪽 어깨에 상당한 무게감이 실려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앉아있었던 옆자리 손님은 피곤했는지 내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난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 자신이 솔로라는 것에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서 그녀의 숙면에 최대한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단호한 현대의 남성처럼 어깨를 튕겨내며 이를 거부할 것인가?


평소 스스로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녀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동안은 숨도 제대로 안 쉬었던 것 같다. 몸의 움직임을 왜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그녀가 이뻤냐고 비난하겠지만, 내가 에얼리언도 아니고 고개를 비틀어 자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경직에 경직을 거듭한 자세로 버스는 달려가고 있었다. 보통 당시의 우리 집과 약속 장소는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한 30분이 지나서였을까? 나는 슬슬 몸이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받침대가 있다면 잠시 그녀의 머리를 받쳐두고 호기로운 기지개를 켜고 싶었다. 하지만 킹스맨에 나왔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좀 더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그렇게 40분이 지났을 무렵, 버스는 한 정류장에 도착했다. 맨 앞좌석에 앉아있던 나는 올라타는 새로운 승객을 보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회사 동료였다. 그녀는 사내의 CNN으로 불릴 정도로 입이 가벼웠다. 마이클 조던이 Air jordan 대신 그녀의 입을 신었다면 더 높고 멀리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녀는 험담과 뒷담화로 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그녀의 언어를 느낄 수 있었다.


'최주임 이 자식, 평소에 여자 친구 없다고 그렇게 외롭다고 하더니 이러고 데이트하고 다니는구나?'


난 결백했다. 내 옆에서 기대서 졸고 계신 분은 오늘 처음 만난 분으로 아직 통성명도 못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봐도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난 멋쩍은 웃음으로 대충 인사를 하고 동료가 뒷자리로 가는 것을 그렇게 방치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니, 이 여자는 뭘 했길래 이렇게 조는 것일까? 하지만 40분간 이어온 킹스맨스러운 매너를 지금에서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나갔던 회사 동료에게 카톡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할까 생각도 했지만, 나는 동료의 전화번호도 없는 상태였다. 난감했다. 내일 출근하면 온 직원들이 내게 묻겠지. 여자 친구와 언제부터 사귄 것이냐고, 몇 살이냐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나도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옆에서 연신 졸고 계신 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평소 잠이 많은 것 같다는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정보였다.


그렇게 버스는 약속 장소에서 두 정거장 전까지 도달했다. 이제 슬슬 그녀를 깨워야 했다. 이것도 난감했다. 어떻게 깨워야 할까? '이 사람아. 저는 이제 내려야 합니다'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약간의 어깨 들썩임으로 그녀를 자연스럽게 깨워볼까? 나는 그 순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 핸드폰의 벨소리를 키워보자. 그것이 내 아이디어였다. 나는 평소에도 잘 오지 않는 전화의 벨소리 음량을 선택하여 억지로 벨소리가 나게 했다. 몇 초가 지난 순간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시크하게 말을 뱉어냈다.


"아저씨, 전화 왔어요."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총각이지만 아직 난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난 1시간 가까이 너를 위해 안락의자를 자청하며 내 인간적 유동성을 최소화했건만.. 난 곰쓸개를 갈아 마신 듯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곧 내릴 때가 되었다. 나는 삐진 남자의 전형적인 표정을 지으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그 September 노래 부른 가수랑 닮았어요."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나랑 별로 나이도 차이 나지 않은 듯한 인상이었다. 다만 온 얼굴에 자리 잡은 개구쟁이 느낌이 다소 철이 없어 보였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그 이후 버스에서 내린 나는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 분이 나랑 닮았단 말인가. 난 내 모든 인생을 다 살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웃긴 것은 동영상 주소를 문자로 보내준다며 내 연락처를 받아갔던 그녀는 여전히 내게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다시 술자리 안주로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난 그 가수와 여전히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https://youtu.be/Gs069dndIYk

September를 부른 가수를 볼 수 있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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