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이들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무언가
어쩌다 추천 리스트에 올라온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듣고 있는 아침의 단상.
그의 음악은 참으로 좋지만, 개인적으로 류이치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다. 작품을 좋아한다는 건 대개 저작자를 좋아하는 것과 연결되기 마련이지만 내 경우엔 또 그게 완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서 작품과 사람이 별개인 경우들이 종종 있다.
영화 음악의 거장이라 불리는 또 다른 한 사람, 엔리오 모리꼬네가 2020년 타계했을 때는 지금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류이치의 음악보다 모리꼬네의 그것을 더 애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을 들었을 때의, 뭐랄까 나를 이루던 수많은 조각 중의 하나가 상처받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한데, 이 아침에 류이치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고, 내가 모리꼬네의 죽음에서 그러했듯, 자신의 일부분이 상처받은 것처럼 아픔을 표현하던 많은 이들의 말과 글이 생각났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은,
'아, 그 사람들도 여전히 류이치의 음악을 통해 그의 존재를 어쩌면 생전보다 더 강렬하게 느끼고 있겠구나.'
다양한 방식과 형식의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보고 있는 요즘 내가 느끼는 생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연결'이다. 먼저 간 이들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간다는 '연결감'을 느낀다는 것.
최근 읽은 책 <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장석주 작가와 박연준 작가, 두 시인이 이미 세상을 떠나간 같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다른 방식의 기억과 감정'을 편지로 담아낸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또 다른 나의 '그 사람들'을 떠올렸다. 엔리오 모리꼬네가 그렇고 박완서 작가가 그렇고 장영희 교수님이 그렇고 또...
기억을 거슬러 보면 내게 처음으로 그런 '존재'였던 사람은 김소진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자전거 도둑' 같은 책들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나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의 문장들을 애정하며 작가의 이른 죽음을 슬퍼했고, 20대 초반이던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그와 연결된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큰 족적을 남기는 이름 있는 분들이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는 '기억'이고 '추억'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어떤 눈부신 과학도 해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바로 그것 아닐까.
언젠가 글에서도 남긴 것처럼 나는 '우리 아이가 나중에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줄까' 하고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박완서 작가님의 따님이신 호원숙 작가님이 엄마를 기억할 때마다 쓰는 수식어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안 그래도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더 기록에 의미를 두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도 같다.
아이와의 일상을 기록하고, 아이를 인터뷰했던 글을 남기며 그때의 내 감정 역시 함께 기록하고, 어떤 시절의 내 생각과 관심사들도 기록해 둔다.
기록을 남기는 그 순간 자체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 기록들이 내 아이와의 '연결 장치'가 될 먼 훗날을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이 '기록'도 같은 맥락이다.
오랜만의 인사,
오늘도 굿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