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이자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1편에 이어...)
내가 웃음을 되찾고 나자 아이도 다시 늘 웃는 행복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나는 정말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던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모자라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시절로 돌아와 있다니요. 그것도 목소리도 있으니 사랑한다고 매일 말해주고, 아이와 웃음소리 가득한 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정말로 꿈만 같았지요. 눈물 흘릴 일이 없으니 그건 또 얼마나 좋던지요. 나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툭하면 울고 누가 눈물 글썽이는 것만 보아도 따라 울던 사람인데, 눈물을 가져가 주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은 거죠.
1학년을 마치던 날이었어요. 유난히 선생님과 사이가 좋고 정이 많이 든 아이는 마지막 날 학교에서 돌아와 펑펑 눈물을 흘렸어요. 나는 이제 담임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계속 만날 수는 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 위로했는데, 아이 말이 아주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나신 대요.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깊이 정들어 버리지 못하는 아이였으니 일 년을 함께 한 선생님과의 이별에 서러워하는 게 당연했지요.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달래 주었어요. ‘괜찮을 거야, 어떻게든 연락을 하면 되니까 아주 영영 이별하는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그 말이 내 귀에도 아무 감정이 없게 들리더군요. 속으론 눈물이 차오르는데 맞아요, 나는 눈물을 주어버렸잖아요. 눈물의 감정이 없으니 그 위로가 그저 건조한 말의 조합으로만 들릴 수밖에요. 눈이 충혈되도록 한참을 울던 아이는 그러다 지쳤는지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와 함께 슬퍼하며 위로했더라면, 안아주었더라면 아이는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혼자 눈물을 흘리다 잠든 아이가 너무 외롭고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나는 울 수가 없었어요. 슬퍼할 수가 없었어요.
밤이 찾아오고 나는 어둠 속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어요. 다시 마녀인지 마법사인지를 부른다면 이번엔 눈물 대신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나는 그 무엇도 생각해 낼 수 없었어요.
그리곤 생각했죠.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아이의 어린 시절로 돌아왔지만 이것이 과연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나. 이미 지나간 내 삶 어딘가는 아이에게 미안한 구석도 있고 잘못한 부분도 있고 슬픈 장면들도 있었겠지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살고 사랑하고 표현했던 나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던 게 아닐까. 혹 부족하다 생각됐던 아쉬운 마음에 다시 시간을 돌리고만 싶었던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구나, 하고 말이지요.
맞아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몇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가다니요.
도대체 어떻게 내가 여기 와있는가 싶은 순간, 눈앞에 불이 반짝 켜지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내 눈에 강력한 불빛을 들이대며 살펴보고 있었어요. 그 옆엔 눈물범벅이 된 아들 녀석이 서 있었지요. 나는 꿈을 꾼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세월을 거슬러 돌아갔다 온 것일까요.
의사 선생님이 아들을 보고 말했어요. “이제 어머니를 보내 드릴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아이가 이젠 거칠어진 중년 아저씨의 까슬까슬한 볼을 내 얼굴에 갖다 대었어요.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해주었죠.
“엄마,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고마웠고 행복했어요. 엄마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들 하나도 잊지 않았어요. 엄마는 나한테 늘 다정했고 따뜻했고 사랑해 줬고 믿어줬어요. 엄마, 나는 그래서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어요. 엄마가 내 엄마였으니까. 엄마가 나 자랄 때 항상 하던 말 있잖아요. ‘나중에 나중에 누가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너 어릴 때로 딱 한 번만 돌아가고 싶다고 할 것 같아. 그런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엄마는 지금 매일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할 거야’라고. 엄마는 정말 최고였어요. 사랑해요, 사실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많이 엄마를 사랑했는데 나야말로 충분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엄마한테 배운 대로 물려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사랑하면서 살게요.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행복하다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나요.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었네요.
이제 정말로 삶을 끝낼 시간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처럼 다시 숨을 부여잡지는 않을 거예요. 마녀인지 마법사 인지도 불러내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까요.
그렇다고 전혀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정말로 온전히,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일들은 너무 많거든요.
아이 손 실컷 잡는 것, 엉덩이 토닥토닥하는 것, 아이가 갑갑하다고 할 때까지 꽉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주는 것, 간지럼 태우며 까르르 웃음소리 듣는 것,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잠든 얼굴에 뽀뽀하는 것, 귓속말로 아침에 깨우는 것, 함께 춤추는 것, 잘했다 칭찬해 주고 괜찮다 격려해 주는 것, 그리고 너를 믿는다 응원해 주면서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늘 든든하게 지켜봐 주고 싶어요.
‘엄마 엄마’ 부르면 별 것 아닌 일이라도 얼른 달려가 주고, 사소한 일에도 함께 웃어주고, 아이의 슬픔과 서러움을 같이 느끼며 위로해 주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손 내밀어 주고, 언제든 엄마 품을 내어주면서 살고 싶어요.
커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며 때로는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혼자 인생을 헤쳐 나가는 아이를 조용히 응원해 줄 거예요. 슬픈 티를 내면 아이가 자기 세상을 향해 떠나지 못할 테니 안으론 울더라도 겉으론 세상에서 가장 씩씩한 엄마가 될 거예요. 사실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더 많이 많이 그러고 싶어요.
지금 내가 생의 끝자락에 하고 있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다들 하게 될 거예요.‘아가야 천천히 크거라’하면서 일찌감치 훗날의 그리움을 미리 깨달은 엄마들도, 당장 힘이 들어 ‘어서어서 크기만 해라’하는 초보 엄마들도,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하는 학부모들도 언젠가는 내 이야기가 생각날 테지요.
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뒤를 돌아보지 말고, 지금 미리 한 번 나중의 그 순간으로 슝 하고 다녀와 봐요.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한번 불러보고, 안 되면 상상력이라도 총동원해 보세요.
내가 마지막으로 남길 선물은 그 말 뿐이네요. 자, 이제 그럼 진짜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