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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나는 방파제

오늘도 성장하는 중입니다.

by 따름

어려움 앞에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더군다나 무력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은 나아질 수 있겠지.


초보 엄마였던 시절,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단연 아이가 아플 때였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는데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보다 더 무능할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아픈 아이를 안고 새벽 이 병원 저 병원을 뛰어다니던 밤들.
그때 나는 엄마라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상상 속 시뮬레이션만 반복하는 무력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는 그렇게까지 심하게 아프진 않았고
지금은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도 크고 작은 병에 걸리고,
작은 사고로 다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엄마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자세히 잘 모르니 더 불안하고 불안하니 더 무력한 상황이었다.


며칠 전, 큰아이가 며칠을 내리 두 세 시간마다 코피를 쏟아 내었다.
처음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지나쳤지만,
코피가 몇 시간 동안 멈추지 않자
나는 다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엄마로 되돌아갔다.

급기야 새벽엔 ‘응급실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백일도 안 된 아기를 업고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걱정 많은 엄마를 오히려 남편과 큰아이가 진정시키는 이상한 장면.
결국 아이는 아빠와 함께 동네 야간 진료 병원을 다녀오고
응급 처치를 받았다.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밝기 전까지 또다시 두세 번의 코피로 잠은 설쳤지만
전날보다 횟수가 줄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또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어지러워하는 아이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없구나’ 싶었던 무력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전 우연히 본 영상에서
한 뇌과학 박사님이 말하길,
무력감 없이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실제로 사흘 동안 이어진 ‘코피 전쟁’으로
일상의 루틴은 완전히 무너졌고
신경은 예민해졌고
나는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니까.


나는 언제쯤 무던해질 수 있을까?
이렇게도 부족하고 모자란 내가,
과연 ‘어른’이 될 수는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파도를 맞고,
얼마나 더 부딪혀야
파도가 와도 아프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일상 속에 코피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수많은 변수들.
그 존재들을 나는 언제쯤이면
평정한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바닷가 수많은 방파제 돌들 중 하나일 뿐이다.
파도가 부딪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그 파도가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약한 파도만 와주길’ 기도하는 지금의 나,
그 약한 마음을 이번에는 다잡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방파제는 파도가 있어야 존재의 이유가 생긴다.
파도가 없다면 방파제는 그저 무용한 돌덩이에 불과하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완성’이고,
완성은 곧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파도 앞에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도에 깎이고, 닳고, 부서지더라도
하루하루 잘 쌓아가는 것.
그렇게 결국 잘 소멸해가는 것.
그게 진짜 삶의 방향 아닐까.


이번 주, 두 시간에 한 번씩 코피를 흘리며 힘들어하는 아이 곁에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이번에 또 한 걸음 자란 것 같다.

빠르게 지혈하는 법,
코피에 대처하는 능력.

무엇보다 아픈 아이보다 덜 흥분하거나 덜 불안한 척 해야겠다는 생각.
여전히 한참 모자란 부족한 엄마이지만 조금씩 엄마로써, 한 인간으로써 성장하는 중이다.

내일의 파도와 눈싸움할 용기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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