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그 기다림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
살롱쉬는 갓 결혼한 새댁들의 모임이다. 그 모임의 회원인 은지는 선희, 경희와 만나 오랜만에 소식을 나누었다. 은지가 새로 어렵게 시작한 일에 대한 고민을 친구들에게 터 놓는다.
은지는 아이를 자기 손으로 직접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은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늘 남동생이 있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집을 나서며 늘 “동생 잘 챙기고”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노는 것도 같이, 숙제도 같이, 밥도 같이. 은지에게 동생을 돌본다는 것은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이는 일이었다. 몇 학년이었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둘이서 수제비를 해 먹거나, 밀가루 반죽으로 칼국수를 만든다며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장난을 치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동생이랑 짓궂게 놀며, 장난치던 골목과 마당, 곤로와 아궁이, 안방과 툇마루는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치 오래된 영화 한 편을 혼자서 보는 기분. 슬픔과 기쁨, 외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나 홀로 간직한 작은 상영관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 공존이 당연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 은지가 아무리 동생을 잘 챙기는 맏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자신도 어린아이이다. 낮에는 동생보다 친구들과 노는 일이 더 좋았다. 남동생이 귀찮아 일부러 빨리 달려 사라지거나 숨기도 했고, 누나 이름을 부르며 눈물범벅,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흙바닥에 넘어져 우는 동생을 따돌리고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어른스러웠다가 짓궂었다
그 시절 많은 부모들이 맞벌이를 했고, 은지의 부모님 역시 때로는 늦은 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오셨다. 골목의 가게 앞 주황색 공중전화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던 그 당시, 저녁이 되면 은지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었다. 하루 종일 의젓하게 잘 지내느라 써버린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엄마가 마당 수돗가에게 발 씻어 주시곤 번쩍 안아 마루에 올려주시길 기대했고, 엄마가 끓여주신, 별다른 재료 없이도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던 김치찌개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동생 잘 돌봐주어 고맙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엄마가 얼른 오셔야 내일 또 동생이랑 잘 지낼 에너지가 생길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동생이 잠들면 은지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녹슨 철문이 찍, 소리를 내며 열리기만을.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대문 옆 화장실 지붕 위로 올라갔다. 화장실 위는 작은 독들이 놓여있는 곳이었고 그곳은 우리 집으로 향하는 사람을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작지만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장독대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골목 어귀를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낮보다 더 곱고 부드럽게 갈린 시원한 스무디 같은 공기를 가슴 한껏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장독대에 비친 불빛이 달빛인지 가로등 불빛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불빛을 벗 삼아 엄마의 구두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멀리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오면 혹시나 하고 가슴이 뛰지만, 엄마가 아님을 알고 다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장독대 사이로 숨어든다. 그러다 또 조용히 고개를 빼꼼. 드라마에선 그렇게 엄마랑 만나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던데 은지가 '엄마마중'이라는 동화를 보며 눈물을 지은 이유는 아마 엄마를 기다리다 혼자 들어가 잠든 날이 더 많아서일까. 은지는 실제로 엄마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결국 지쳐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 애잔한 마음만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은지는 다짐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만큼은 엄마의 퇴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 기다림이 5분이든 1시간이든,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다고 전업주부로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일을 놓으면 영영 다시는 잡을 수 없는,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이 끊어져 저만치 튕겨 나갈 것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전업맘에게는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없다. 눈을 뜨면 출근이고, 잠자리에 누우면 퇴근이다. 깨어 있는 시간은 곧 근무시간이고, 야근에 철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정식 직장만큼의 무게로 여겨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일도 보람되지만 다른 분야에서 쓰임을 확인받고 싶었다.
은지의 마음속에는 늘 두 가지 마음이 상충되었다. 결핍의 상속에 대한 불안감과 그로 인한 죄책감, 그리고 온전한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이 두 마음은 끊임없이 부딪히며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내 결핍을 아이들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온전한 한 인간으로 홀로 당당히 서고도 싶었다.
그래서 은지는 고민 끝에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출근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이들 곁에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예뻐하는 아빠가 있으니 마음이 놓였고, 아이들도 아빠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은지는 야밤의 자유부인이 되어 출근 버스에 올랐다. 밤에 출근하는 일은 낯설고 신비했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한 밤에 일을 한다는 느낌은 어색했지만, 동시에 보람찰 것 같았다. 하루 24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쓰는 기분, 가정에도 보탬이 되고, 아이도 잘 키우며 일을 놓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은지는 설레기까지 했다. 일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는 안도감이 있었고,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쓰임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은지에겐 그랬다.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시작하는 또 한 번의 출근은 은지에게 산소호흡기와도 같았다. 내 월급으로 사 마시는 커피는 유난히 더 맛있었고, 출퇴근 시간을 이용한 공부는 ‘살아 있다’는 실감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은지에게 가장 큰 관건은 체력이었다. 퇴근 후 바뀐 밤낮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아침에 퇴근을 했고, 낮에 아이들이 학교와 어린이집에 간 시간에 잠을 청했다. 그럼에도 피로는 조금씩 쌓여 갔다. 게다가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자주 깨며 엄마가 집에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아무리 아빠가 옆에 있어도 부족했다. 남편 역시 퇴근 후 또다시 육아 현장에 투입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 아니면 은지가 너무 빨리 포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은지는 생각에 잠겼다. 어린 시절의 결핍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공허감은 여전히 삶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공허감을 어떻게 지혜롭게 채워나갈 것인가였다.
은지는 문득 TV에서 본 이야기를 떠올렸다. 쓰레기를 집 안 가득 쌓아두고 사는 사람.
은지 역시, 자신이 집안에 쓰레기를 모아두고 사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 뚫린 구명을 외면한 채 그 빈자리를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또 마음속에 뚫린 빈자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지금 행복할 수 있을까. 채워지지 못한 것을 채우려다, 정작 현재를 또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스쳐 가는 소중한 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은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무엇을 채워야 하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가.
[함께하는 작가님]
지혜여니 / 따름 / 다정한 태쁘 / 김수다 / 바람꽃 / 아델린 / 한빛나 / 새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