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서 큰 세계 (6)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다시 살아난 감각은 청각이었다.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편견은 어린이도서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 잠깐만 있어도 얼마나 다양한 소리들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지 실감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이 더듬더듬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책 읽는 소리는 설레는 봄의 소리였다. 또 사락사락 책을 넘기는 소리는, 책에 빠져 있는 독자의 숨소리와 어우러져 도서관이란 공간을 청각적으로도 확장시켜 더욱 도서관답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어린 아기에게 손짓, 발짓 써가며 그림책을 읽어주는 풍경은 어떠한가? 책에 실린 글자만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온갖 표정을 비롯한 비언어적 표현으로 최선을 다하는 (책을 물성으로써도 두드리고 돌리고 만져보게 하는) 소리는 ‘이 아기는 앞으로 책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구나’란 확신이 들게 한다. 아기는 이에 화답하듯 박수를 치고, 까르륵 웃고, 옹알옹알 말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책을 받아들인다.
‘책보’(책 읽어주는 엄마 모임) 동아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을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간단한 독후활동을 하는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또 어린이집, 유치원을 대상으로 견학과 단체 열람을 진행했는데 나는 이때 꼭 그림책을 한 권씩 읽어주었다. 한동안 화요일 오전엔 ‘화요낭독회’를 열어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직접 낭독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활동과 모임들의 공통점은 ‘소리 내어 읽기’이다. 입 밖으로 활자를 내뱉게 되면 신기하게도 그 말을 곱씹게 된다. 묵독을 할 땐 정신 차리고 읽지 않는 한 생각이 삼천포로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낭독은 어떤가? 소리를 내야 하니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고, 공기 중에 글자들이, 문장들이, 이야기가 울려 퍼지면서 그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와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꼭 누군가가 곁에 없어도, 혼자 낭독을 해도 이런 경험은 가능하다. 내 목소리로 듣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묘하면서도 매력적인 구석이 많다. 이런 낭독의 기쁨도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책을 매개로 부담 없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것 중에 함께 읽기는 그야말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다 큰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 놀란 얼굴로 새삼스럽게 이런 말들을 하기 일쑤였다.
“아니! 이 책에 이런 그림이 있네요. 몰랐어요.”
“음, 이런 내용이었네요. 이제야 제대로 본 느낌이에요. 전혀 다르게 읽혀요.”
“누군가 저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건… 처음인 거 같아요.”
그렇다. 이게 바로 함께 읽기의 힘이다. 같이 읽으면, 또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곳은 하나의 특별한 장소가 되고 그 시간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박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것이라도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는 입장이 되면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어떤 톤으로 읽을 것인지, 어느 부분을 강조해서 읽을 것인지, 다 읽은 뒤 질문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읽어 주는 자’의 권력과 힘을 가지게 된다. 특히 어른이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어줄 땐 아이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아이에게 책은 때론 삶 전체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어른들은 책으로 권력을 행사할 때가 적지 않게 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다양한 시선을 제공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바로 아이에게 맨 처음 책을 접하게 해주는 어른의 몫이다. 그래서 나도 ‘읽어 주는 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어른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준이 또렷할수록 알게 모르게 내가 가진 생각을 강요하게 되진 않을까, 늘 조심한다.
그럼에도 책을 고르고 읽어 주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 특히 그 일을 사서가 한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나는 가끔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는 책을 사기도 한다. ‘언젠가’ 읽겠지만 그게 꼭 지금이 아님에도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고 급히 주문을 누르는 것이다. 도서 리스트가 나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만큼은 꼭 주문해서 그 책의 작가에게, 출판 관계자에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하셨다, 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에 산 책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책은 『김지은입니다』이다. 나는 이 책을 제일 먼저 남편에게 읽어주었다. 차례와 뒤표지만 읽어도 충분히, 그래, 충분히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서 선물이라고, 나보다 먼저 읽길 원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지은의 승소는 우리 사회에서 전복적인 일이었다. 남편이 남성이기 때문에 김지은이 어떤 용기를 내어야 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같은 슬픔과 아픔을 겪지 않는 한, 상대방의 삶을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기에 굉장히 치열하게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는 고작 어느 한 부분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보다 약자,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내가 겪어보지 않은 자리의 일이라면 알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만약 평생을 정규직으로만 지냈으면 절대로 비정규직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을 살아냈기에 그 자리만이 갖는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작지만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어떤 구절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내 생각 역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