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말하는 '뇌의 재개발'
"기술 때문에 우리가 점점 퇴화하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특히 스마트폰 없이는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내 기억력이 나빠졌나?' 자책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퇴화'가 아니라 우리 뇌가 환경에 맞춰 지능적으로 자원을 재분배하는 '뇌의 재개발' 과정에 가깝습니다. 몇 가지 심리학 용어로 이 흥미로운 현상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에 비유합니다. 우리 뇌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려는 본능이 있어서, 굳이 힘들게 처리할 필요가 없는 정보에는 힘을 쏟지 않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전화번호를 수백 개씩 외우는 것은 뇌에 상당한 부담, 즉 '인지 부하(Cognitive Load)'를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라는 완벽한 '비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뇌는 "아, 이 힘든 일은 스마트폰에 맡기고, 나는 더 중요한 다른 생각을 하자!"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억력의 퇴화가 아니라, 제한된 뇌의 자원을 비효율적인 암기에서 벗어나 더 창의적이고 중요한 사고에 투자하려는 뇌의 '전략적 선택'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전화번호를 외우던 뇌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졌을까요? 바로 '분산 기억(Transactive Memor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산 기억'은 특정 정보를 내가 직접 외우는 대신, '누가' 또는 '무엇이' 그 정보를 아는지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과거에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직접 외웠지만, 지금은 '친구의 번호는 내 스마트폰 연락처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합니다. 즉, 기억의 저장소가 뇌 내부에서 스마트폰이라는 외부 장치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암기력'이 아니라, 방대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고(검색 능력), 여러 정보를 엮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정보 융합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뇌 가소성(Neuroplasticity)' 덕분에 가능합니다. 뇌는 굳어있는 기관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에 따라 신경회로를 계속해서 바꾸는 말랑말랑한 점토와 같습니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암기 근육'을 덜 쓰니 그 부분의 신경망은 약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대신 정보를 검색하고, 여러 앱을 동시에 활용하고, 온라인에서 소통하는 '디지털 활용 근육'을 자주 쓰니 그 부분의 신경망은 훨씬 발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술 발전 이후 세대가 보여주는 새로운 능력의 실체입니다.
이제 우리는 AI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AI가 글의 초안을 써주고, 복잡한 데이터를 분석해 주는 세상이죠. 이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 논리적인 글을 구성하는 능력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 위험이 있습니다. AI의 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뇌가 더 고차원적인 능력을 개발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AI 시대의 다음 세대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뇌 근육'을 채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질문의 힘: AI에게서 최고의 답을 끌어내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비판적 사고력이 핵심입니다.
인간 고유의 공감 능력: AI가 흉내 낼 수 없는, 타인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소통하며 협업하는 능력.
윤리적 판단력: AI가 제시한 효율적인 답이 과연 인간 사회에 옳은 것인지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적, 윤리적 사유 능력.
결론적으로 기술은 인간을 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가진 놀라운 적응력, 즉 '뇌 가소성'을 자극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능력을 갖추도록 이끄는 촉매제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능력을 아쉬워하기보다, AI라는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어떤 새로운 '뇌 근육'을 단련시킬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요즘은 LLM을 이용한 AI를 넘어 AI 에이전트라는 도구가 세상에 점점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AI 에이전트를 태어날 때부터 사용하게 될 세대들의 세상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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