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싶싶한 하루 보내세요>를 읽고
자기 계발서나 수필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노곤한 하루를 마치고 누워있자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시 경청하여 듣는 데에 신물이 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하루 온종일 타인의 이야기에 격려와 공감을 하고 있자면, 적어도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내 흥미를 돋우는 일을 하고 싶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다. 이야기든, 말이든, 삶이든 타인이 늘어뜨려놓는 말을 눈으로 꾸준히 훑어야 한다. 그래서 독서는 진입장벽이 높다. 어릴 때 문득 책을 읽는 속도가 궁금해서 재보았더니, 나는 소설책 기준으로 한 시간에 60페이지를 읽었더란다(장평, 글씨 크기, 종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3-4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은 끝내는 데에 6-7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어떤 기묘한 접점이 아니고서야 타인의 말을 7시간씩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싶싶한 하루 보내세요>(이하 싶하보)는 평소 sns로 꾸준히 동경해 마지않던 지인을 통해 미리 읽을 기회를 얻었다. 책을 읽을수록 깨달은 점이라면, 아, 나는 생각보다 수필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이다. 수능에서 흔히 말하던 신변잡기적인 수필의 특징을, 왜 나는 죽자 사자 공부하던 그 시기가 아닌 지금에야 마음으로 이해할까.
한 시대를 공유하는 비슷한 나이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생활 반경을 가지고 쓰는 여러 편의 글이 어쩜 이렇게 나에게 파동 치며 다가올 수 있는지. 다름은 조미료가 되고 비슷함은 울림이 된다.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고 성찰한다'는 닳고 닳은 수필의 의의를 그제야 이해한다.
완전히 소진된 어느 날, 친구를 만났을 때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물어오면 대답하기 어렵다. 스스로 일을 정리해나가는 일, 특히 의식하지 않고 있던 하루 일과를 적절한 언어로 나열하기란 생각보다 품이 드는 일이다.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자연스레 하는 게 쉬운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내 삶의 궤적을 한탄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궤적을 베이스로 어떻게 앞을 바라볼지 렌즈를 찾는 게 어떠냐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러나 다그침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 나는 <싶하보>의 작가들을 찾아갈 것 같다. '초등교사의 일과'에서 덤덤히 말하는, 글에서 우러나는 엇비슷한 마음들을 읽고 싶어질 것 같다. 나도 그랬노라고, 오늘 하루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반복되다 보면 루틴이 생긴다. 어떤 루틴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작가들이 알고 책을 내주어 다행이다. “나를 z세대(a.k.a.90년대생)로 묶지 마세요!”라고 한껏 외치던 z세대의 전형이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에 위로받는다.
결국, 그 자리에서 그 시기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지금 나이의 우리 성별이 쓸 수 있는 글은 특히나 귀하다. 나만 이 땅을 딛고 있다는 게 아니구나, 하는 묘한 연대감이 책을 읽는 내내 몸을 타고 흘러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다만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