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곰 Sep 13. 2022

지금이어야만 쓸 수 있는 어떤 글에 대해

<싶싶한 하루 보내세요>를 읽고

자기 계발서나 수필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노곤한 하루를 마치고 누워있자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시 경청하여 듣는 데에 신물이 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하루 온종일 타인의 이야기에 격려와 공감을 하고 있자면, 적어도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내 흥미를 돋우는 일을 하고 싶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다. 이야기든, 말이든, 삶이든 타인이 늘어뜨려놓는 말을 눈으로 꾸준히 훑어야 한다. 그래서 독서는 진입장벽이 높다. 어릴 때 문득 책을 읽는 속도가 궁금해서 재보았더니, 나는 소설책 기준으로 한 시간에 60페이지를 읽었더란다(장평, 글씨 크기, 종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3-4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은 끝내는 데에 6-7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어떤 기묘한 접점이 아니고서야 타인의 말을 7시간씩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싶싶한 하루 보내세요>(이하 싶하보)는 평소 sns로 꾸준히 동경해 마지않던 지인을 통해 미리 읽을 기회를 얻었다. 책을 읽을수록 깨달은 점이라면, 아, 나는 생각보다 수필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이다. 수능에서 흔히 말하던 신변잡기적인 수필의 특징을, 왜 나는 죽자 사자 공부하던 그 시기가 아닌 지금에야 마음으로 이해할까.


한 시대를 공유하는 비슷한 나이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생활 반경을 가지고 쓰는 여러 편의 글이 어쩜 이렇게 나에게 파동 치며 다가올  있는지. 다름은 조미료가 되고 비슷함은 울림이 된다.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고 성찰한다'는 닳고 닳은 수필의 의의를 그제야 이해한다.


완전히 소진된 어느 날, 친구를 만났을 때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물어오면 대답하기 어렵다. 스스로 일을 정리해나가는 일, 특히 의식하지 않고 있던 하루 일과를 적절한 언어로 나열하기란 생각보다 품이 드는 일이다.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자연스레 하는 게 쉬운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내 삶의 궤적을 한탄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궤적을 베이스로 어떻게 앞을 바라볼지 렌즈를 찾는 게 어떠냐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러나 다그침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 나는 <싶하보>의 작가들을 찾아갈 것 같다. '초등교사의 일과'에서 덤덤히 말하는, 글에서 우러나는 엇비슷한 마음들을 읽고 싶어질 것 같다. 나도 그랬노라고, 오늘 하루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반복되다 보면 루틴이 생긴다. 어떤 루틴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작가들이 알고 책을 내주어 다행이다. “나를 z세대(a.k.a.90년대생)로 묶지 마세요!”라고 한껏 외치던 z세대의 전형이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에 위로받는다.


결국, 그 자리에서 그 시기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지금 나이의 우리 성별이 쓸 수 있는 글은 특히나 귀하다. 나만 이 땅을 딛고 있다는 게 아니구나, 하는 묘한 연대감이 책을 읽는 내내 몸을 타고 흘러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다만 살아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거미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