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인 줄 몰랐다.
남편과 나, 둘 다 그런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기에.
시어머님이 대학병원 진료가 있으셔서 올라오시면서 오리 백숙을 가지고 오셨다.
결혼기념일에 뭘 해 줄까 고민하시다가 오리 백숙이 좋다고 해서 손수 챙겨 오셨다고.
감사했다. 남편과 나도 잊어버린 결혼기념일을 어머님이 기억하고 챙겨주셔서.
결혼기념일인 걸 알게 된 이상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됐다.
한편으론 이제 결혼 10년 차인데, 꼭 굳이 챙겨줘야 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병원 진료 마치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꽃다발이라도 챙겨주라고 하셨나 보다.
남편, 나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
"꽃이 좋아요? 돈이 좋아요?"
음.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다.
"돈이요."
이런... 그냥 둘 다요!라고 해도 되는데.
솔직히 뭘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우리가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데 조금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한 달 전 남편 생일날, 노트북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남편이 일할 때 노트북이 필수인데, 몇 년 전에 중고로 샀다.
새 노트북으로 사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렇게 큰돈을 본인에게 사용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좀 무겁고 충전할 곳이 있어야만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10년을 사용했던 노트북을 조금은 좋은 것으로 바꾼 지 3년 정도 됐다.
어느 날, 남편이 자기 노트북이랑 내 노트북이랑 바꾸겠냐고 장난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10년 이상 사용할 목적으로 산 것이었기에.
그때부터였다. 돈을 모아서 남편에게 노트북을 선물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본인이 못 사겠다니 내가 선물로 사주면 되니 말이다.
남편 일을 재택으로 도와주면서 작은 돈이지만 급여를 받고 있었기에 조금씩 모았다.
그래서 결혼기념일 전날 질렀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으로. 3년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사양으로.
두 아들, 내 모습을 보더니 아빠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얘기한다.
그러더니 종이와 펜을 가져와서 글자를 적더니 내게 준다.
결혼기념일 축하한다며, 엄마 고맙다고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담긴 색종이 쪽지를.
아빠에게도 썼다며 엄마에게 주는 척할 테니 엄마도 아빠를 잘 속여야 한다는 당부까지 한다.
저럴 때 보면 장난기 못 말린다.
그날 밤, 아이들과 자기 위해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둘째 아들, 갑자기 할머니께 받은 돈 5만 원을 내게 주겠단다.
그 돈으로 책을 사라고.
옆에 있던 첫째 아들도 자기도 5만 원을 줄 테니 책을 사란다.
어쩜, 이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나.
5만 원은 큰돈인데도 엄마를 위해 이렇게 사용하다니.
그럼 엄마, 아빠가 꼭 읽고 싶은 책 사겠다고 했더니 둘째가 아빠 말고 엄마만 쓰란다.
왜냐고 물어봤더니 아빠는 노트북이 있지 않냐는 거다.
그건 엄마가 선물한 거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엄마가 책을 좋아하니까 엄마가 사라고.
결혼기념일 당일, 남편은 나에게 책 네 권을 건넸다.
우와. 뭐야. 이 남자. 이런 것도 선물할 줄 알았어? 놀랐다.
내가 이미 산 책도 한 권 있었지만, 나머지 세 권은 차츰 사야지 생각만 했던 책이었는데.
너무너무 고마웠다.
세 남자 모두 책을 좋아하는 내게 각자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물을 준 것이다.
너무 사랑스러운 남자들이다.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들이 있는데 주문 후에 아이들에게 알려줘야겠다.
너네들이 준 돈으로 이렇게 책을 샀다고.
그러면 엄청 뿌듯해하겠지? 나도 기분 좋고 말이다.
남편에게 선물한 노트북도 결혼기념일 당일 왔다.
언박싱을 하면서 이제 남편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좋아한다.
자기는 절대 못 샀을 거라면서, 고맙게 잘 쓰겠다고 얘기한다.
선물 받은 노트북으로 좋은 기운 받아서 일이 더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런 결혼기념일도 좋네 싶다.
항상 챙겨주지는 못하겠지만, 가끔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