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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너의 손길

by 느린 발걸음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너의 손길

사랑하는 사람이 만져주는 조심스럽고 애정이 담긴 손길과는 거리가 먼 너의 손길

내 머리카락을 너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나의 의사 따윈 과감하게 생략하는 너의 손길

미용사가 되어 내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묶어 주겠다며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너의 손길

어느새 포기한 채 네가 원하는 대로 소파 앞에 앉아서 너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


가끔 우리 집에서 벌어지는 둘째 아들의 일방적인 내 머리카락 손질

갑자기 안방에서 빗, 핀, 헤어롤 등을 가져와서 세팅하는 너

도대체 저것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한 나

미용사와 손님의 관계를 설정하고 나에게 말을 거는 너

어떤 스타일을 원하느냐의 너의 물음에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고 대답하는 나

그럴 수는 없다고, 이쁘게 해 주겠다면서 손님의 이야기 따윈 귀담아듣지 않는 너

조심조심 만지는 듯 하지만 거칠고 투박한 너의 손길

저 조그만 손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기다리는 나

솔직히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는 나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놓고 빗으로 빗다 머리카락이 엉켜 아파하는 나

잠시 미안함을 가지지만 참으라며 다 이쁘게 하는 과정이라고 얘기하는 너

손님이 아파하든 말든 예술혼(?)을 불태우는 너

빗으로 빗고, 이리저리 핀으로 꽂아보고, 헤어롤은 왜 말아놓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너

어차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냥 포기하고 앉아 있는 나


드디어 다 됐다며 이쁘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너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데 뭐가 다 됐다는 것인지 의아한 나

거울을 가져오더니 어떠냐고 물어보는 너

거울로 내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려 있어 간지럽고 불편하다고 투정 부리는 나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마치 귀신같다며 혼자 깔깔 넘어가는 너

손님을 귀신처럼 만들어놓고 혼자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나

괜찮다며, 이쁘다고 하면서도 웃음이 끊기지 않는 너

저 아이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씩 미소가 지어지지만 오래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은 없는 나

만족스럽다고 이야기하며 이제 그만 일어나도 되냐고 물어보는 나

아직 안 된다며 다른 스타일링을 해보겠다며 해맑게 웃으면서 다시 나를 앉히는 너


그때부터 미용사에 빙의해 네 마음대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너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은 상태로 빗질을 해서 많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는 나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너

아픈데 어떻게 참냐며, 빗질을 제대로 해달라고 항의하는 나

알겠다며 능청스레 대꾸하는 너

옥신각신 상태로 몇 번을 주고받다 드디어 내 머리카락을 마음껏 가지고 놀았는지 그만하겠다고 하는 너

이제 드디어 벗어난 것인가 싶어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

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정리하는 너

비록 제자리는 아닐지라도 얼추 비슷하게 넣어놓는 너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며 머리가 조금은 얼얼한 상태로 드디어 일어나는 나


나의 머리카락은 희생(?) 당했지만 너에게는 신나는 시간이었을 테니 만족하는 나

언젠가 이 시간이 그리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나

조금 더 상냥하게 손님 역할을 해줄 것 그랬다는 아쉬움에 너를 바라보는 나

방금까지 미용사 일은 잊고 금세 다른 놀이에 빠져있는 너

그런 모습을 보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 짓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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