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책 속 한 문장

by 느린 발걸음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문장이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단순, 평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끔찍’이라는 단어. 껄끄러웠다.

한 사람의 생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너무 무례한 건 아닌지.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을 텐데, 그 삶을 제삼자가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데 왜 굳이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그냥 소설 속 한 문장으로 읽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아마 겁났던 것 같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 나의 생을 저렇게 표현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반 일리치의 삶이 어땠길래 톨스토이가 저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지.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가 병에 걸린 후의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왜 굳이 힘겨워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을까?

죽음의 종류는 다양한데, 왜 처참한 고통 속에 주인공을 뒀을까?

병에 걸린 후 죽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건 아니지만, 부정, 분노, 회의, 좌절, 의심, 희망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서서히 사그라드는 삶을 자세히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어찌 보면 괜한 지면 낭비에 시간 낭비 아닌가.

일종의 경고일까? 자기 삶을 제대로 살지 않으면, 즉 끔찍하게 살면 죽음 또한 끔찍할 거라고.

그런데 솔직히 이반 일리치의 삶을 가장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만하면 잘살고 있는 축에 속하는 것 아닌가?

판사라는 번듯한 직업에, 잘 꾸며놓은 집에, 상류층 인사들과 관계를 맺는 삶.

‘한 번은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꿈꾸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반 일리치 말처럼 가뿐하고 유쾌하고 점잖게 사는 삶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렇게 살기 위해서 버린 것들이 꽤 있을 것이다.

모든 걸 삶에 담을 수는 없으니 내게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만 곁에 뒀을 거다.

그렇지 않은 건 다 무시해 버렸겠지. 그런데 그가 무시하고 버린 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면?

톨스토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지나온 자기 생을 천천히 돌아보라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식의 삶을 살고 있는지.

여기서 잠깐 멈추고 확인해 보라고. 이 방향이 맞는지 한 번씩 점검하지 않으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주인공처럼 괴로워할 수 있음을.


나는 어떻게 살고 있지?

나도 이반 일리치처럼 보여주기식의 삶을 살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다.

내 속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상황에 맞춰, 주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움직였다.

내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진정 내 의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아마 그래서였겠지. 번아웃과 우울감이 자주 밀려왔던 것은.

하지만 그때조차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혼자 유난 떨 필요 없다고 여겼다. 주변을 봐도 그랬으니까. 조그마한 우물 안에서 생각과 행동의 반경을 넓히지 않았다.

우물 밖을 뛰어나가면 다른 게 있다는 걸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면 겁나서 모른 체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왜? 내 삶인데 내가 중심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달라지고 싶었으니까.

이전까지 외면했던 진짜 나를 찾아야겠다 마음먹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헛다리 짚고 헤맬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과정을 거쳐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자갈길을 일부러 피해왔다면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 삶에 난 다양한 길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굳이 힘든 길을 자처하진 않겠지만, 그런 길을 마주했을 때 이젠 피하지 않고 대면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던 것.

다행히 나는 4년 전에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멈췄다.

멈춘 상태에서 나를 돌아봤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내 삶을. 그제야 알았다.

산을 오른다고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지만, 진정한 나와는 점점 먼 방향으로 가고 있었음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민하다 그나마 쉽다고 느껴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에도 책을 읽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책을 읽고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남기는 것. 쉽지 않았다. 왜 굳이 힘들게 써야만 할까.

그냥 머릿속에만 남겨도 되는데. 하지만 안다. 머릿속에 있는 건 금방 휘발된다는 걸.

힘들어도 꾸역꾸역 했다. 그 기록이 이젠 4년이 되어 간다.

처음엔 책을 읽은 후 감상문을 썼다면 지금은 내 일상 같은 다른 글도 쓰고 있다.


내가 왜 굳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니 내면의 나와 대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 외면하고 무시하기만 했던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누구나 그러고 사니까 유별나게 그러지 말라고 억압만 한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보듬어주지 않았던 나를.

그래, 나는 나를 찾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지금도 나 자신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중간에 다른 것들도 조금씩 하면서.

그런데 그 기간이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지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결정이 쉽지 않다. 어렴풋이 방향은 잡았지만, 여전히 흔들린다. 꽤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제대로 헤맸을까? 헤매는 척한 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희미한 빛을 길잡이 삼아 한 걸음 내디디고는 있는데 자신 있는 발걸음은 아니다.

여전히 조심스럽다. 왜 그럴까?


심리학자 카를 융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화된 에고, 페르소나가 나를 막아서 그런 것 같다.

사회적인 나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느낌.

‘개성화’되는 나를 방해하려고 내면으로 깊이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힘드니까. 변화해야 하니까.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테니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거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이반 일리치처럼 나중에 고통스러울 것 같다.

‘내가 진정 나로 살았나?’ 질문하면 머뭇거리며 기회를 더 달라고 소리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를 찾는 과정을 포기하면 안 된다.

어떻게 사는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다.

주변의 많은 영향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삶이니 내 책임이다. 그걸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

나중에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해 힘들지만 희미한 길이라도 감사히 여기며 뚜벅뚜벅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멈춰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방향을 점검할 시간.

내가 원했던 방향이 아니라면 다른 방향으로 가면 된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계속 가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점점 희미해져서 어느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길은 연결되어 있다. 지금 방향을 잠깐 틀었다고 해서 문제 되지 않는다.

나중에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명심해야 한다. 이건 내 인생이라는 걸. 그러니 내 인생을 살자.

그렇게 내 인생을 사는 순간이 쌓이면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이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남은 내 생은 나로 채워보고 싶다. 그렇게 내가 중심이 되어 주변과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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