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한 문장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 생존 기계일 뿐이라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배웠는데?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개체와는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지금은 인간이든 다른 생물이든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예전에는 인간이 최고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아니, 지금도 인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나?
그런데 인간이 한낱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로봇 운전자라면?
도대에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 책을 다 읽고 약간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인간이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기계일 뿐이라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았다는 걸 보면.
과학서들을 읽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지 않나라는 생각.
더 나아가서는 어차피 죽을 텐데 열심히 살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을 때도.
책을 읽어보면 DNA 분자는 뉴클레오티드라고 하는 작은 단위 분자로 구성된 긴 사슬이다.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단위는 A, T, C, G 네 종류밖에 없는데, 이건 모든 동식물에게 동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이 연결되는 순서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며 우월감에 취해 있던 건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된다고 한다.
어떤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나는 객관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침팬지와 인간, 도마뱀과 곰팡이, 모두 대략 30억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진화해 왔다는 점은 모두 똑같다는 거다.
아...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주장을 우리는 왜 지금까지 믿어왔던 걸까?
언제, 누가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이런 주장이 쭉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시작은 기원전 4세기 전후 고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가 결정적이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래저래 대단한 인물이다. 서양 사상의 뼈대를 만든 사람이라 그런가.
어쨌든 그는 생명체를 위계적 사다리로 봤다고 한다. 인간만이 이성(logos)을 가진 존재여서 다른 생명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이 생각이 중세 기독교 시대를 거치면서 굳어졌다.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 결합되면서 확정된 셈.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인간은 신 다음, 자연 위에 놓인다는 생각이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 ‘만물의 영장’ 사고가 상식이 된 시기인 셈.
이런 생각이 쭉 이어져 오다가 17~18 근대에 들어오면서 데카르트가 이 생각에 기름을 붓는다.
인간은 이성적 정신을 가진 주체, 동물은 감정 없는 기계라고 하면서 인간, 자연의 분리가 극단적으로 강화된 시기라고 한다. 이는 산업혁명, 자연 정복 논리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인간은 가장 고등한 존재라는 생각이 거의 의심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인간을 최우선으로 놓은 시기가 꽤 오래됐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때가 다윈 이후, 즉 19세기부터다.
인간도 진화의 한 결과로, 생물학적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영장'이라는 절대적 위치에 균열이 시작됐다.
20세기 이후 생태철학, 동물권,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인간은 생태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관점이 생겼고.
음... 그러고 보면 이런 과학서가 나온 시기도 다윈 이후일 테니 오래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인간을 생태계의 최우선에 올려놓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쭉 해왔다는 의미일 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인간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고 했으니, 충격이 엄청났을 것 같다.
아, 이전에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게 조금 더 일찍 발견되긴 했었구나.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까지 믿어왔던 천동설이 16세기 코페르니쿠스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러다 17세기 갈릴레이의 망원경 발명, 뉴턴의 만유인력 등으로 지동설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자리잡았다.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상식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충격도 엄청났다고 한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는데,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한 점일 뿐이라는 의미이니까. 신학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살아남은 게 있다고 한다. 이성의 특권.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이 시대의 믿음을 대변한다.
즉 신에서 인간 이성으로 중심이 옮겨간 것이다.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이성을 가진 최고 존재로 군림하게 되면서 인간 중심 사고의 ‘황금기’가 된 것이다.
그런 우월감에 취해 있었는데, 다윈의 진화론이 그런 생각에 한번 더 찬물을 끼얹은 셈.
지동설은 “너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면, 진화론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너희는 특별한 존재조차 아니다.” 다윈은 인간의 ‘자격’을 흔들었던 셈이다.
그러니 많은 혼란을 겪지 않았을까. 인간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 거니까.
아마 당시 많은 반발이 있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견해를 받아들일 만큼 인간은 그리 포용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예전 시대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다윈 이후에 태어났음에도 왜 이 책을 읽고 조금 허무했을까?
나도 모르게 인간이라는 종을 특별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인간은 생존기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같다.
팩트는 팩트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이후의 의미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이 책을 읽고 허무주의에 빠지든, 내 자유의지가 있으니, 유전자가 하라는 대로 아닌 다른 방향으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든.
나는 허무주의에 빠져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다른 생명체 중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그렇다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내 삶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뭐, 힘들 때는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시기는 찰나다. 감정이 지배하는 그 찰나에 내 인생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과학서를 읽으면서 '창발'이라는 개념에 눈길이 갔다. 원래 없던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긴다는 의미.
똑같은 유전자의 조합이라도 할지라도 그걸 어떻게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괏값이 나오는 게 아닐까.
가끔 힘들 때는 꼭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면서 내게 맞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
어쩌면 유한한 인생이기에 열심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