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결혼기념일이 있는 달이다.
남편과 나는 기념일을 그렇게 챙기는 편이 아니라서 서로 축하한다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너무한가 싶으면 두 아들이 학교 갔을 때 둘이 점심을 같이 먹거나 가끔 선물을 챙기는 정도다.
둘 다 이벤트 이런 건 하지도 못하고 무던하게 넘어가는 성격이라 이런 게 편하다.
그렇게 우리가 결혼한 지도 올해 햇수로 11년 차.
몇 번의 결혼기념일이 있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아 있는 날은 없다. 보통의 날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하지만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두 번의 결혼기념일이 있다.
이건 두 아들과 관련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첫 번째는 결혼 후 첫 결혼기념일. 그때는 첫째 아들이 태어나 육아에 정신없을 때였다.
당시 시어머님이 우리 집에 올라와 계셨고, 남편이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으로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케이크를 사 들고 밤 10시 정도에 퇴근했다.
남편은 아이를 재워놓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려고 생각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날 첫째 아들이 오후 넘어서인가부터 계속 찡얼거렸다. 열도 조금씩 오르고 있었고 기침도 했다.
생후 6개월까지 영유아 검진, 예방접종 제외하고는 아파서 병원에 가 본 적 없었기에 겁이 났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여서 감기와 이가 나는 시기가 겹쳐서 그렇다는 건 짐작조차 못했다.
집에서 지켜보다가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병원에 가 보기로 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소아응급실이 있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한 곳인 대학병원에 갔다.
그 시간에 사람이 많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접수하고 대기하고 꽤 기다린 후에 진료를 봤다.
그때 시간은 이미 결혼기념일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 아이가 어리고 다른 증상은 보이지 않아서 감기약을 먹이고 네뷸라이저를 하라고 했다.
처치를 한 후 좀 지켜본 후 괜찮아 보인다고 가도 된다고 했다.
약 처방을 받고 병원을 나온 시간이 다음날 새벽 3시경이었나 보다.
아이가 아프니 마음 졸이고 기다려서 피곤한 데다 시간도 너무 늦어서 케이크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잤다.
남편과 첫 결혼기념일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얘기하면서.
그 이후에는 결혼기념일에 아픈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지. 누군가 아프면 모든 게 올스톱되니까.
그런데 올해 결혼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다시 소아응급실에 방문하게 됐다.
다행(?)인지 그날 둘째 아들 안과 진료가 있는 날이어서 대학병원에 있었다.
진료 볼 때까지 당돌한 대답으로 모두에게 웃음을 주던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
진료가 끝난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 갔다 온 둘째 아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거다.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다. 워낙 장난을 잘 치고 연기도 잘해서 속는 경우가 많아서.
그게 아니면 화장실에서 손 씻을 때 앞으로 숙이느라 근육이 갑자기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아이 표정이 영 심상찮았다. 좀 전까지 까불고 장난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증상이 어떻냐고 물어보니 가슴 양쪽을 뭔가가 누르는 듯이 묵직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조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근처 의자에 앉아 있자고 했다.
그런데 앉으니 더 아프다면서 울었다. 안아주거나 업어주려고 했는데 그건 더 아프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계속 아프다며 울먹거리는 둘째를 보며 나, 남편, 첫째 아들 모두 당황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소아응급실로 향했다.
그런데 소아응급실에서 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그 당시 중환자가 있는 응급상황이라 오후 4시 30분까지는 아무도 받지 않는다는 거였다. 황당했다. 그때가 3시 45분쯤이었는데, 남은 시간을 아이가 아파하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건가.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이 갑갑하고 답답했다. 병원에 있는데 진료조차 받지 못하니 더욱더.
다른 소아과는 진료의뢰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료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해도 통화조차 되지 않고.
아이는 옆에서 아프다고 아예 쪼그려 앉아서 울먹거리고 있고.
남편이 옆에 가정의학과라도 일단 먼저 가보자고 해서 갔다.
성인 진료만 하는 곳이라 진료에 제약은 있겠지만 접수는 받아준다고 해서 조금 기다렸다 진료를 받았다.
당황한 기색이 여력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 그래도 신체사정과 문진을 했다.
소아라서 여기서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며 진료의뢰서를 전산으로 써 줄 테니 소아응급실로 다시 가보라고 했다. 그때 시간이 오후 4시 20분 정도였나 보다.
아이는 옆에서 비슷한 강도의 통증을 호소하며 쪼그리고 주저앉아 힘들어하고 있는데,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병원 시스템에 조금 짜증이 났다.
4시 27분쯤 소아 응급실에 도착하니 진료 접수를 받아준다고 했다.
나는 둘째 아이 옆에 꼭 붙어 있어서 남편이 보호자 연락처를 적어야 하는데 정신이 반쯤 나가서 내 전화번호를 못 적고 있었다. 평소 침착한 남편인데 아이 일이다 보니 당황한 게 보였다.
나는 그때 조금 침착해진 상황이어서 내가 적고 둘째 아들과 함께 응급실로 들어갔다.
남편과 첫째 아들은 함께 들어갈 수 없어서 응급실 밖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고.
접수하고 들어가도 진료가 바로 이뤄지진 않았다.
그 안에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내가 보기엔 아이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건 응급인 것 같았는데 의료진 입장에선 아니었나 보다. 순서대로 간호사정을 한 후 또 기다렸다 의사 문진을 했다.
들어가서 보니 응급실 전공의 1명, 교수 1명, 간호사 몇 명이 응급실 전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진행이 빨리빨리 되지 않은 거였다. 의사의 부재가 여전하구나 싶었다.
다른 곳은 전공의가 많이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여긴 아직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보호자가 받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이 좀 답답하고 짜증도 났다.
다행히 응급실에 들어가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증상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앉지도 못했던 아이가 이젠 의자에 앉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나마 한숨 돌렸다.
1시간 10분 넘게 지속되는 강도 7 정도의 통증이 이젠 6에서 3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어서면 여전히 통증이 있는 상황이어서 심전도, 흉부 X-ray 촬영을 먼저 했다.
남편에게는 틈틈이 전화통화로 상황을 알려줬다. 밖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걱정할 것이 뻔했으므로.
응급실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통증의 강도가 조금씩 줄어든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시 통증이 나타날 수 있으니 피검사를 하고 결과 나오는 2시간 동안 수액을 맞고 심장 모니터링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응급실 안에서 2시간 넘게 기다렸다.
가끔 아이들은 속 쓰림을 가슴 통증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서 속 쓰림 방지약을 주사로 맞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는 통증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도 모르니 진통제를 먹으라고 해서 시럽으로 먹였다.
통증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둘 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검사 결과 나오기 전까지 금식을 해야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데, 그때 시간이 오후 8시였다. 배고플 만한 시간이었다.
8시 넘어서도 검사 결과가 안 나오자 아이가 너무 배고파한다고 하니까 편의점에서 간단한 거라도 사 먹고 오라고 했다. 드디어 가족이 모였다. 편의점에서 먹을 만한 게 도시락밖에 없어서 둘째 아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남편과 첫째 아들은 먼저 먹으라고 얘기해서 먼저 먹었었다.)
다 먹고 정리하고 있으니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응급실에 오라고 해서 갔다.
검사상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이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심전도를 했는데 이상이 없었고, 혹시 기흉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해서 흉부 X-ray 촬영을 했는데 이상 없다고 했다. 피검사도 모두 정상이라고 했다.
혹시 아이들은 체했거나 속 쓰린 증상을 가슴 통증으로 나타낼 경우도 있다고는 하셨는데, 비슷한 강도로 통증이 1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하나 싶었다.
어쨌든 별다른 약이나 처치, 외래도 잡을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셔서 퇴원했다.
9시 다 된 시간에 병원을 나서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내일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요. 첫째 때는 결혼기념일날 응급실 왔는데, 이번엔 결혼기념일 전날 응급실을 왔네요. 이건 도대체 뭘까요?"
"그러게요.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말이에요."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우리 응급실에 다시 오지 말자고. 너무 힘들지 않냐고.
둘째 아들은 자기 너무 고생하지 않았냐고 얘기한다. 그래, 고생 많았지. 갑자기 아팠으니.
옆에서 아픈 아이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도, 남편도 고생 많았고.
얼떨결에 병원에서 6시간을 심심하게 있어야 했던 첫째 아들도 고생 많았고.
다들 애쓴 날이었다.
다음날 혹시 몰라 선생님께 이야기하고 둘째 아들 학교도 하루 쉬면서 집에서 봤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결혼기념일 당일, 아이는 집에 있고, 남편과 나는 전날 피곤함으로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모두 건강한 걸로 만족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