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한 문장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루리의 <긴긴밤>에 나오는 문장으로, 할머니 코끼리가 어린 흰 바위코뿔소 노든에게 하는 말이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를 찾기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할 때가.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기의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른이란 이름이 되어서야 겨우 한 발짝 떼는 사람도 있을 거다.
어쩌면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이 내 길이라 믿으며 살아갈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하는 소리는 한 번씩 들어봤을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이 길이 맞을까? 아니면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하나?'
인생을 살면서 몇 번 마주하는 이런 내면의 소리를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잡아두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도 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삶이 결정되는 것 같다.
혼자 결정하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할머니 코끼리처럼 나를 알아봐 주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
지금까지 내가 나로 존재해 왔던 장소를 떠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익숙함, 편함과 작별하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곳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거니까.
그곳이 아무리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던 공간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마 많은 고민이 있을 테다. 내가 선택한 길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고, 내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데리고 갈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은 마음을 먹고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것, 그게 진짜 시작일지 모른다.
한 걸음 내디뎠는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펼쳐질 수도 있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 길에서 한 내 선택들의 결과는 쌓이고 쌓일 거다. 그게 비록 실패일지라도.
누가 억지로 강요한 길이 아니기에 책임감도 더 느끼겠지.
오롯이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을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부산에 살았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본 적도 거의 없기에 부산이 익숙한 곳이었다.
부산에서도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않아서 집과 그 주변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그러다 익숙했던 장소를 벗어나 서울로 오게 된 건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솔직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원래의 나라면 아무리 집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
아마 그때쯤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집이라는 곳이 나에게 안식처가 되지 않음을 나이가 들수록 더 절실하게 느낄 때였다. 그런데 나에게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그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이십대 중반에 서울이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노든처럼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노든은 자기를 찾기 위해 떠난 거라면 나는 벗어나기 위해 떠난 게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건 맞는 셈.
쉽지는 않았다. 집 형편상 아무런 지원을 해줄 수 없었고, 나도 전혀 그런 걸 바라지 않았기에 고시원에서부터 내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오롯이 나의 힘으로 (집에 생활비를 보내주면서) 살아가는 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까지 나는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다면,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날 것 그대로의 세상에 노출된 것이다.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 셈.
물론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곳이고 혼자라는 생각에 밤에 울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이 더 익숙해졌다. 혼자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다.
부산에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 여러 경험들과 그때 느꼈던 감정들.
혼자 살면서 알게 된 현실적인 것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아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해 봐야 아는 것들.
부동산에 가서 살 집 알아보기, 계약서 작성, 등기부등본 등 각종 서류 확인, 관리비, 수도세, 전기세, 도시가스비 등 각종 공과금, 전입신고, 이삿짐센터, 전자제품 등 고장 났을 때 수리법, 전등 교체, 결로를 막기 위해 해야 하는 것, 요리, 집안일 적절히 분배해서 하는 법 등.
처음 하는 것들이어서 버벅댈 때도 많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쌓이면서 익숙해져 갔다.
혼자 살지 않았으면 해 볼 일이 없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하면서 세상이라는 곳에 조금씩 스며 들어가는 느낌.
당시엔 힘들 때도 많았는데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이 말이 꼭 장소를 뜻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트는 것도 해당되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나는 결혼 이후 내 삶의 방향이 다시 한번 바뀐 셈이다.
이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직접 가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것들.
아, 장소도 바뀌었다. 직장 생활 때문에 서울에서만 쭉 살았는데 서울 근교 경기도로 이사했다.
처음엔 서울을 벗어나는 게 이상했다. 익숙함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알았다. (아파트에 살기는 하지만 행정 구역상 읍인 곳이다.)
나는 이런 곳이 잘 맞는다는 걸. 주변에 공원이 있고 서울에서 보지 못했던 각종 동물, 곤충들을 보고, 기러기, 청둥오리 떼들이 이동하는 걸 지켜볼 수 있는 곳. 조용해서 마음마저 평온해지는 곳.
이곳으로 오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거다. 지금은 남편이 서울로 가자고 해도 내가 싫다고 한다.
십 년 넘게 다녔던, 익숙했던 직장과 작별을 고한 곳도 이곳에서다.
두 아들을 낳고 긴 육아 휴직을 하면서 자연스레 경력 단절의 기간이 길어졌다.
처음엔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책을 읽고 온라인 강의를 틈틈이 들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십 년 넘게 한 익숙한 일이었고, 비슷한 종류의 일이라도 하리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나하나 해나가면서 알았다. 비슷한 계통도 내게 맞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한 걸음 내디디긴 했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책을 읽고 기록하면서부터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었을 수도 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을 뿐.
시기가 조금 더 빨랐다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내가 준비되지 않을 시기였을 거다.
결혼, 두 아들의 양육이 내게 가져다준 것이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다.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었으니.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는 것에서 일상과 지금 내 생각을 남기는 것으로 확장됐다. 일종의 감정의 배출구인 셈.
일단 하고 있는 도서 리뷰, 일상 남기는 걸 꾸준히 해보려고 한다.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면 더 좋고.
이건 내가 직접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많은 선택지에서 몇 가지로 압축해서 집중하려고 하고 있고 간간히 수정도 하고 있다.
처음엔 산만하기만 했던 것이 이제는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다. 여전히 헤맬 때도 많지만.
많은 것을 가지치기하고 내가 집중해야 할 몇 가지를 정해서 매일 꾸준히 해보려 한다.
그게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
조급함, 욕심을 버리고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하고 싶다.
어쩌면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한 길과 해보고 싶었던 궁금함이 남아 있는 길.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상황에 따라 다를 거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라면 꿈은 한창 멀어 보일 거다. 꿈이 뭔지도 모를 수도 있고.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서 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숨어 있던 자그마한 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때 그 길을 무시하지 않으면 된다. 그게 어떻게든 내 삶을 다르게 변화시킬 테니까.
그 길이 내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직접 가보지 않으면 상상만으로 부풀려지기만 할 뿐.
노든이 간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코끼리 속에 있었다면 힘든 경험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노든의 삶을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거다. 그렇기에 노든은 떠나겠다는 다짐을 한 거고.
아마 나도 많은 갈림길에서 익숙한 길을 선택해 왔을 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번쯤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