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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발걸음 Aug 30. 2023

세탁기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 몇 주


세탁기가 고장 났다.

8/8일 평소와 다름없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세탁이 끝나려면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는데 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어? 물 내려가는 곳에 머리카락 등 이물질이 많이 끼었나? 나중에 빨래 끝나면 청소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나왔다. 

그런데...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세탁기에서 에러 표시가 뜬 것처럼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어? 뭐지? 얼른 세탁실로 가 보았다.

이런... 세탁기 뒤쪽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자기가 무슨 분수인 것처럼 세차게 물을 뿜어대고 있다.

너무 놀라서 잠깐 멍 때리다 정신을 차리고 일단 세탁기 전원을 모두 껐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모두 잠갔다. 그랬더니 처참하게 물이 사방이 튄 세탁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탁기 안에는 아직 세탁을 하다 만 세탁물들이 가득한데...

눈앞이 깜깜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것인지... 뭘 해야 하지? 생각이 안 났다.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AS 접수를 하라고 한다. 

아... 맞다! AS! 그러기 위해선 뭐가 문제인지 알아야 하니까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가까스로 확인하니 냉수 연결하는 호스가 빠져있다. 끼워 넣을 수 있나 봤더니 그냥 부러진 거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기에 사진을 찍고 그제야 스마트폰으로 AS 접수를 했다

그런데... 음...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 AS 접수가 많아서 어쩔 수 없단다.


하... 저 세탁기 안에 들어있는 세탁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휩싸인다.

저대로 놔두면 수건도, 입을 옷도 없고, 냄새도 엄청날 텐데...

어쩔 수 없이 손빨래를 하기로 했다.

여동생은 빨래방을 가면 되잖아? 쉽게 말하지만 빨래방을 가기에는 빨래들이 다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불가능했고, 물을 머금은 이 아이들은 너무 무거웠다.

세탁기 문을 열고 대야에 세제물을 잔뜩 머금은 세탁물을 하나씩 꺼낸다.

아... 너무 무거운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몇 번에 걸쳐서 가져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일일이 하나씩 빨고 헹군다.

헹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몇 번을 헹궈도 비눗물이 계속 나온다. 비눗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최대한 깨끗하게 하고 있는 힘껏 빨래를 비틀어 짠다. 그즈음 팔에 힘이 거의 다 빠져 힘들었다.



https://pin.it/2x4 oBRH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목이 너덜너덜해지는 느낌... (두 아들 어릴 때 많이 느껴본 후 잊고 있었는데...)

새삼 예전에 세탁기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빨래를 어떻게 했을까 싶다.

이렇게 힘들었을 텐데... 당시엔 옷이 많지 않아서 지금보단 괜찮았으려나? 

다행히 건조기는 건재했기에 탈수도 되지 않은 빨래들을 건조기에 집어넣고 나머지를 맡긴다.

건조기도 버거웠는지 몇 번에 걸쳐 건조를 꾸역꾸역 한 뒤 뽀송뽀송한 빨래를 뱉어냈다.


그날 하루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빨랫감과 전투 아닌 전투를 치른 후 고이 숨어있던 손목 보호대를 꺼내서 꼈다. 두 아들은 이게 뭐냐고 물어본다. 엄마 지금까지 빨래했더니 손목이 너무 아파서 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했는데... 하나씩 자기들 달란다. 자기들도 손목이 아프다고... 

"뭐 했다고 손목이 아파?"

"에이, 엄마! 나도 손목이 아파! 나도 이것저것 하잖아.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엄마 얼른 하나 줘봐."

음... 그래그래, 다 가져가라. 아이들에게 하나씩 손목에 채워줬는데, 재밌다고 키득키득 웃는다.

그래, 너네들이 재밌으면 나도 된 거지 뭐 생각한다. 


일주일 되기 전에 기사님이 연락을 주셨는데, 자기네 호스가 아니란다. 타사 AS에 연락하든지, 타사서비스센터를 방문해서 호스만 따로 사서 교체하면 된다고 알려주신다.

아... 그제야 우리 집 두 대 있는 세탁기(아기 세탁용 통돌이 세탁기와 드럼 세탁기)가 다른 회사 제품임을 알아차린다. 동서가 첫째 아들 태어난 선물로 준 아기 세탁기가 먼저 있었고, 이사 오면서 그전에 사용하던 중고세탁기는 버리고 새로 사면서 이전에 아기세탁기에 연결된 호스를 그대로 연결해서 사용했던 거다.

음... 사서 교체하기엔 저 틈이 너무 좁아 어쩔 수 없이 타사 AS를 신청한다.

여기는 더 많이 밀려있네... 거의 2주를 기다려야 한다.

2주 동안 가끔 손빨래를 하고 빨래방도 2번 방문했다. 세탁기가 고장 나서 빨래방을 편리하게 이용하긴 했지만, 빨랫감을 한가득 모아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우리 집 세탁기는 방치된 채 3주가 지났다.

세탁기를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아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했다. 세탁기 잘못도 아닌데...

드디어... 8/29일 AS 기사님이 방문하셨다!! 수리하시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아 뚝딱 해결하신다.

우와...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3주를 끙끙거렸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시다니!!

드디어 내 집에서 편하게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어찌나 기쁘던지...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에 집에 있는 귤과 음료수를 챙겨드렸다.

기사님이 가시자마자 세탁조를 한번 헹군 후 빨래를 시작한다. 아... 세탁기가 잘 돌아간다.

세탁기의 웅웅 거리는 기계 소리가 가끔 시끄럽다고 느껴지기도 했는데, 오늘은 정겹게 들린다. 

'나 이제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쌩쌩 돌아간답니다.'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분이 좋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기계가 멈춤으로써 난 엄청 불편함을 느꼈다.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쓱 한번 바라봤다.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들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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