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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발걸음 Nov 06. 2023

두 아들의 한 장 그림책


며칠 전 저녁,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엄마 나 책 좀 읽어줘."

"책? 잠깐만, 엄마 이거 조금만 하고 읽어줄게."

둘째는 내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나름 기다리고 있다는 자세를 취한다. 

2분 정도 지났을까? 내 옆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서 앉으며 이야기한다.

"엄마, 나 많이 기다렸으니까 이제 책 읽어줘."

둘째를 슬쩍 본다. 많이 기다려줬으니 이제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표정이다.

음... 이러면 어쩔 수 없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알았어, 책 읽어줄게."라고 말하며 책을 달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 읽고 싶은 것인지 봤더니 '무지개 물고기' 책이다. 

며칠 전부터 이 책이 마음에 드나 보다. 계속 이 책만 들고 온다. 

무지개 물고기 책은 나도 좋아한다. 무지개 물고기라는 독특한 소재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의 캐릭터만 잘 잡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리즈로 낼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잠깐 한다. (이럴 때 보면 순수하게만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둘째 아들에게 무지개 물고기 이야기를 읽어준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조금 빨리 읽어줬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엔 이왕 읽어주는 것 천천히 제대로 읽어주자고 마음먹는다. 빨리 읽으면 중간에 발음이 꼬여서 나도 힘든 경우도 많았으니까.

한 권 다 읽었는데 책장에 가서 다른 무지개 물고기 책을 꺼내오더니 이것도 읽어달라고 한다. 

그래, 뭐, 두 권 정도야 싶어 읽어준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라는 것이 문제다.

네 권 정도 쉬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목이 조금 아프면서 목소리도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금 쉬자고 하면 계속 읽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아니 내가 잠깐 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한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둘째에게 최대한 재밌을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무지개 물고기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네가 직접 무지개 물고기가 나오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거야. 그래서 도화지 한 장에 그림책을 만드는 거지. 제목도 넣고 말이야.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어때?"

아이가 자신만의 이야기 책을 만들게 하는 목적도 있지만 내가 조금 편하자는 이유가 더 컸다.

둘째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한다.

"아! 엄마, 그거 너무 재밌겠는데? 알았어!!" 

그러더니 도화지와 그림 그릴 것을 챙겨 와서는 자기 나름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무지개 물고기는 마음대로 잘 안 그려졌나 보다. 몇 번 짜증을 내더니 나에게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림책을 보면서 비슷하게 그려줬더니 둘째는 신이 나서 무지개 물고기를 무지개 색으로 알록달록 예쁘게 색칠한다. 

"엄마, 내가 색칠한 것 어때?" 엄청 뿌듯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알록달록 이쁘게 색칠할 생각을 했어? 너무 이쁘다!!" 

"엄마, 내가 색칠 다 하면 글자는 엄마가 써줘. 내가 아직 유치원생이라서 한글을 모르니까."

"그래, 그래. 알았어. 이야기를 만들어서 불러주면 엄마가 글자는 적어줄게!"

둘째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나에게 들려준다. 

가만히 들어보니 무지개 물고기 책 내용과 둘째가 만들어낸 내용이 섞여있다.

그림과 글자를 쓴 한 장의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 앞에 제목까지 붙여줬더니 한 장의 그림책이 완성됐다. 



두 아들의 한 장의 그림책




둘째는 너무 재밌었는지 또 하나를 만들고 싶다면서 무지개 물고기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고 했다. 

물고기 그림을 그려줬더니 나름대로 색을 칠하고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서 두 장의 그림책을 완성했다. 

둘째가 자기만의 그림책을 완성하는 것을 보더니 첫째 아들도 재밌어 보였는지 자기 나름대로 스케치를 하고 색칠도 하고 있었다.

글자는 본인이 쓸 수도 있지만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라 띄어쓰기도 어렵고, 많은 글자를 쓰면 팔이 아프다며 글만 나에게 써달라고 부탁한다.

음... 내가 조금 편하자고 시작한 일인데 글자 쓰느라 내 팔이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첫째가 불러주는 대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첫째가 옆에서 잔소리를 시작한다.

"엄마, 글자 좀 똑바로 써"

"왜? 이 정도면 똑바로 쓰는 건데?"

"아니야. 조금 더 반듯반듯하게 써야지!"

"아니야. 이 정도면 잘 쓰는 거라고. 알아볼 수 있으면 됐잖아? 나도 팔 아프다고!"

둘이서 티격태격하고 있자 옆에서 둘째, "형. 엄마 글자 잘 쓰는데 왜 그래?"라고 말하며 내 편을 들어준다. 


첫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꽤 길다. 잘 들어보니 첫째 아들은 자기가 생각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동생보다 두 살 더 많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인지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알았다.

나의 글자가 보태지자 첫째는 제목을 쓰고 뚝딱뚝딱 자기만의 한 장의 그림책을 완성했다.

첫째 글자 쓰는 것 도와주는 것을 끝내자마자 둘째 아들은 쪼르르 와서는 자기가 완성한 그림책을 나에게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읽어줬더니 너무너무 재밌고 좋다고 표현하면서, "엄마, 이거 내가 만들었어!" 엄청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두 아들이 좋아하니까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씩 이렇게 만들어서 모아놓아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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