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시대는 부여다. 나라의 몰락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뒷모습이 고왔던 백제에 어찌 애달픈 마음이 들지 않을까.
성왕은 웅진시대를 끝내고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다. 사비는 지금의 부여로 '새벽'을 뜻한다. 우리는 새벽이라는 단어를 통해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희망을 품는다. 성왕에게 사비는 단순히 새벽의 의미가 아니었으리라. 성왕이 사비시대를 열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부여는 얼마나 강건한 국가였는가. 해모수왕이 세운 연맹국가로 요동지방과 아무르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부여는 고구려의 전신이다. 고구려에 패퇴한 백제로서는 남쪽에 있는 부여라는 국명을 내검으로써 고구려보다 강한 국가가 되고자 하였다. 성왕은 수도를 부여로 옮긴 후 철저한 계획에 따라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등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부흥 정치를 펴 나갔지만 당나라와 손을 잡은 신라에게 패퇴하였고 결국 전사함으로써 피우지 못한 꿈이 되었다.
마지막 피우는 불꽃처럼 곱고 화려한 사비시대를 돌아보며 백제의 고뇌와 완숙한 문화의 향기를 맡는다. 부소산성은 평상시에는 백제 왕궁터의 후원이었다가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는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세워졌다. 12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부소산성은 부여 지킴이이자 왕들의 쉼터였다. 성곽보다는 왕의 후원이라는 의미가 컸기에 공주의 공산성처럼 웅장하진 않으나 공원을 거니는 듯한 편안함이 있다.
부소산성 안에 의자왕과 삼천 궁녀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낙화함은 꼭 가보자. 우리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삼천궁녀를 거느린 호색한 왕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자왕은 ‘빼어나게 용맹스러웠으며 담대한 결단력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의문이 들 기도 한다. 낙화암은 실제로 가보면 비좁기 짝이 없는 바위다. 그 위에 삼천궁녀가 서려면 줄을 길게, 아주 길게 늘어서야 할 것이다. 망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하였으리라. 삼천 궁녀는 실제로 3,00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기보다 많은 궁인들을 말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치욕스러운 삶을 택하느니 죽음을 택하여 백마강에 몸을 던졌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부소산성 안, 삼충사에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 홍수, 계백을 기리고 있다. 백제의 멸망을 예견하고 적에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고 가족을 베고 5천의 군사로 5만 대군에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계백장군과 의자왕에게 간언을 하였던 흥수, 성충을 모시고 있다.
산성의 정상부인 부소산 정상에는 사자루가 있으며 여기서 백마강 쪽으로 내려서면 낙화암을 만날 수 있다. 고란초가 많이 자라 고란사란 절 이름을 얻었다는 고란사는 낙화암 가기 전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다. 실제로 고란사에 고란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산성 앞의 꽤 너른 땅은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이다. 건물은 없고 기단이었던 돌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연지 하나가 보인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으니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부소산성과 더불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아직까지 왕궁터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가 확인되지 않아 계속 발굴해 나가고 있다.
왕궁터와 후원을 둘러본 후 정신적 의지처였던 정림사지로 향한다. 정림사지는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세월의 풍상을 겪였는데도 8.33m 높이로 웅건하며 자연미가 흐르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대한민국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단 위에 세워진 지붕돌의 끝자락이 바람에 떠밀리듯 부드럽게 올라가 있어 돌의 경직성이 아닌 나무와 같은 유연함이 느껴진다. 백제의 우아한 예술미가 느껴지는 석탑이다.
석탑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승리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700년 백제시대의 뒷모습은 외세인 당나라의 승리를 알리는 글귀가 쓸쓸함을 배가시킨다. 굳이 당나라 군대가 정림사지의 석탑에 이를 새긴 것은 정림사지가 불교가 성행한 백제 궁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림사지는 전형적인 1 탑 1 금당의 백제 사찰 건립 형식에 따르고 있다.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중문, 금당지, 강당지와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부여를 여행하다 보면 실제로 있는 건물보다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건물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터만 남은 곳에 백제식의 건물이 들어선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정림사지 박물관을 가보자. 백제 궁궐과 정림사지를 재현해 놓았으며 발굴 과정과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시켜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성왕의 사비 천도와 마지막 왕인 의자왕까지 사비시대의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