報의 고장, 정읍 무성서원의 1천년 역사

한국의 서원

by 파란리본 황정희
서원 담장 안에 은행나무 노랗게 물들어 가을을 얘기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너머 명륜당에 유생들이 서책을 앞에 놓고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내가 만난 정읍은 덕치를 기억하고 베푼 이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고장이다. 정읍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의 뿌리는 1천년을 넘는다. 520년을 갓 넘은 조선시대의 사학기관인 서원이 1천년을 넘어 지금에 이른 것은 정읍, 무성서원이 갖는 정체성이다. 가을 은행잎이 물든 날, 청렴함이 묻어나는 무성서원에서 선비정신을 만나려 한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
명륜당에서 바라본 현가루와 태산사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武城里)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우측으로는 칠보천이 흐른다. 다른 서원들이 저절로 공부가 되고 마음 수련이 될 것 같은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한 것과는 달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고운 최치원, 명륜단에서 바라본 태산사 사당

무성서원만이 갖는 정체성은 보은의 의미인 사당에서,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넘는 장구함에서 시작한다. 무성서원의 뿌리는 신라 말 최치원을 모신 생사당이 시초다. 고운 최치원은 신라 정강왕 1년에 이곳 태산(지금의 태인, 칠보 일대)의 태수로 부임해 와 8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합천군수로 떠났다. 그의 치적을 칭송하던 군민들은 성황산 자락에 생사당 태산사(泰山祠)를 지어 그의 덕치를 기억하고 보은하고자 하였다. 생사당은 살아있을 때 모셔지는 사당이다. 이미 떠난 자를 그리워하고 기린다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천년의 세월을 넘는 지금까지 서원 제일 위쪽에 자리한 사당에는 최치원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신라시대 사람을 사당에 모신 곳은 흥성대원군 때 살아남은 47개원의 하나인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을 제외하고 무성서원이 유일하다.

단촐하나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무성서원

고려시대에는 사당인 태산사가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최치원의 사당을 다시 되살리게 된 것은 1400년 무렵에 최초의 가사문학으로 평가되는 상춘곡(常春曲)을 지은 정극인이 이 지역에서 향학당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터다. 그 후 태인에 또 하나의 생사당이 세워졌다. 조선 중종 39년(1544)에 영천 신잠이 이곳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고 떠남에 주민들이 생사당을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

서원에서 그동안 있었던 공사 등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곳 무성리에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겨난 때는 1615년이다. 처음에는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년)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사액과 함께 두 개의 사당이 합쳐졌다. 사액서원은 현판만 받는 것이 아니라 각종 특혜를 받는 다는 의미이다.

무성서원은 9천 평의 땅과 현판, 노비, 서적 등을 받았다. 조선의 서원이 점차 부패의 온상지가 되어간다. 당파의 세력 근거지가 되었고 사액을 받음으로써 따라오는 부가적 혜택은 악용되었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등 병폐가 극심해졌다. 결국 흥선대원권의 서원철폐령이라는 작두가 내려졌고 숙종 때에는 거의 1000여개에 가까웠던 서원이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무성서원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지역민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그 서슬퍼런 칼날 아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당 뒤의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 가까이 마을이 있다

무성서원의 가치는 단순히 교육의 장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백성과 소통하고 나라를 향한 선비의 忠을 지킨 곳이기도 하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이곳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을 필두로 유림 80명이 최초로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진압하러 온 이들이 같은 조선의 백성임에 싸울 수 없다하여 결국 대마도 유배길에 올라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의병이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여도 그들의 호국 정신과 의로움은 귀감이 된다.

이보다 찬란할 수 없을 가을날, 무성서원의 매력에 빠지다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한국의 무성서원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이유를 보면


‘한국의 서원은 현재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평가에 의해서다.


우리나라 서원 9개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무성서원 또한 이름을 올렸으나 규모면으로는 소소하다. 하지만 역사성을 두고 본다면 가치는 확연히 높아진다.


소탈하면서도 편안하다, 소통을 추구한 강당

비록 규모는 작지만 태동과 역사와 함께 한 발자취를 보면 세계문화유산 선정 평가에 가장 부합하는 서원이라 할수 있다. 마을 내에서 지역민을 교육하고 함께 어우러지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의로움을 기리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분연히 일어나는 선비정신을 보여준 한국 서원의 가치를 가장 잘 실천하였다.

입구에서 바라본 무성서원

무성서원을 둘러보는 내내 건물들이 모남이 없다. 공부를 하는 곳이나 기숙사, 사당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나지막하다. 그나마 입구는 2층이어서 이외다. 외삼문 대신에 있는 2층 누각인 현가루가 꽤 웅장하여 서원이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현가루를 지나 만난 강당은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단출하다. 너른 마당에 은행나무 한그루가 가을 색으로 물들어 있을 뿐 시야를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백성들은 스스럼없이 배우고자하는 열의를 드러냈을 것이고 마을에 큰 일이 있으면 누군가를 찾아 가르침을 구하였을 것이다. 공부를 하는 공간인 명륜당을 지나는 바람도 이곳이 소통의 장소였음을 전한다. 양옆으로 방이 있고 가운데 3칸의 마루가 바람이 지나는 통로라도 되는 듯 시원하게 뚫려있다.


기숙사인 강수재

보통 서원 내 기숙사는 동, 서 두 곳이 있으나 이곳에는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있다. 제대로 복원하여 본래 무성서원을 만나 볼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강수재도 강당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양옆에 방이 있고 중앙은 2칸이다. 여전히 바람이 잘 통한다. 무성서원 어느 곳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최소한의 건물과 양식으로 오롯이 무성리라는 마을과 그곳에 살고 있는 민초들에게 녹아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최치원과 신잠 외 위패가 모셔져 있는 태산사 사당

거스름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빼어나지 않아 위안이 된다.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화려함에 있지 않음을 이곳 무성서원이 보여준다. 시대의 질곡을 함께하며 백성의 삶속에 녹아든 정읍, 무성서원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꼬장꼬장하다. 그 꼬장꼬장함이 권세와 타협하지 않은 선비정신이다. 단순히 옛 건물로서가 아닌 서원과 함께 한 조선의 역사까지 짚어 보아야 제대로 된 무성서원의 가치를 만날 수 있다.


외삼문인 현가루

무성서원 : 063-539-5182(정읍시청 문화예술과)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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