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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식개선] 무형문화재 자수장 궁수 이정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 자수장 궁수 이정희(사진=최봉혁 기자) 

전북 진안군 마이산에 자수, 부채, 한지, 공예품 등 다양한 전통 공 예품을 전시, 체험하고 그 분야의 명인 9명이 시연하는 자수 박물관장인 이정희(57세) 한국 전통자수공예가와 지난 대한민국 장애인 예술대 상식 행사장에서 만났다


대한민국 장애예술인중에 드물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자수장 궁수 보유자 인증받은  이정희 궁수와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전화와 통화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인터뷰 기사를 준비하는 동안 건강이 잠시 안 좋아서 대화가 중단되고 회복기를 거쳐 기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침 연말을 맞이해 2023년의 자수공예가 이정희 여사의 이야기가 장애예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이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전한다.

보상화 팔각 탁자 1 무형문화재 자수장 궁수 이정희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자수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해 비장애인 예술가들과  공정한 경쟁을 통해 취임함으로써 공인으로 무형문화재를 계승하는 길에 인생을 받쳐온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관장으로 취임이 알려졌을 때 제일 신나 하는 건 14살 된 아들이 학교에서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아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나도 큰 기쁨으로 다가왔으며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


저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마비되어 걸어 다닐 수 없어서 집안에서 기어 다니며 생활했다. 바깥세상이 그리워 창문을 열어 놓고 몇 시간씩 창밖을 내다보며 갇힌 생활을 하였다. 12살까지 외할머니댁에서 살다가 할머니가 연세가 드셔서 나를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게 되어 집으로 왔다.


손재주가 있어서 뜨개질, 바느질, 퀼트공예, 그림 등순으로 하는 것은 다 잘했다. 당시 자수가 유행을 했는데 수를 놓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처음에 자수 일을 하는 분께 배웠다. 주로 민 자수였고, 일본 자수도 했다. 그런데 도안에 실 색까지 정해 주는 자수에 흥미를 잃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자수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서울에 가면 자수를 가르쳐 주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다고 하여 서울로 와서 중요 무형문화재 한상수 선생님이 운영하는 전수관을 찾아가서 자수를 배우겠다고 청했다.


그곳에는 나처럼 장애가 심하지는 않은 지체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궁중자수를 처음 보았는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고풍 스러 워서 매료됐다. 궁중자수를 꼭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넘쳐났다.


전수관은 한옥이었다. 전기장판 하나로 겨울을 나야 했다. 손에 동상이 생길 정도로 추위가 매서웠다. 추위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화장실 가기가 힘들어서 소변을 참는 일이었다.

까치와 호랑이 무형문화재 자수장 궁수 이정희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은 나를 왕따 시켰다. 나에게 경주에 있는 공방으로 가라며 내쫓은 려고 했지만 나는 자수를 배울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이겨 냈다.


그곳에서 궁중자수뿐만이 아니라 장식, 생활용품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재건축이 되는 바람에 나는 고향인 정읍으로 내려왔다.

자수는 참 고단한 작업이다-


2년 동안 한 선생님께 배운 자수를 나 혼자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하루 10시간 이상 자수를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수가 예뻐도 공식적인 경력이 없는 나는 기술자일 뿐 더 이상도 장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작품이 팔리지 않았고 판매해도 겨우 재료값만 받는 정도여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여성 장애인은 한복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돈도 안 되는 자수를 괜히 했나 후회하기도 했지만 전 우리 전통을 무형문화재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고 싶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자수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도 험난했다.


공모전에 응모를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즈음 고창에 사시는 분이 와서 내 작품을 구매해 가셨는데 그분은 작품을 아주 신중하게 고르셨다. 그래서 참 좋았다. 내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느껴졌다.

그분은 세 차례 내 작품을 구매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작품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응모를 하여 세 번 모두 상을 받았다. 


같은 사람의 작품인데도 그 사람 이름으로 내면 당선이 되고 내 이름으로 내면 탈락이 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감에 빠졌다.


그 사람은 내가 장애인이니까 도용을 해도 된다는 장애인을 얕보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삼을까도 생각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장애인 인권 의식이 약해서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 묻을 수밖에 없었다. 

1

996년에 전북 전통공예작품 공모전에서 특선을 하며 인정을 받았고 그 후 필요한 자격증을 한 가지씩 확보하며 황실 명장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예다움을 설립 운영 시작-


2004년부터 전시회도 하고 사회 활동이 늘어났다. 나사렛대학교 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에게 한국 자수를 가르쳤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자수를 배우기 위해 고생했던 시절이 떠올라 장애인에게 한국 전통자수를 가르치기도 하고 다양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서 판매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교육장 겸 가게 겸해서 예다움을 설립했다.


교육생이 10명 정도 되었는데 장애인이라고 나와 똑같은 의지와 열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치열함이 없었다. 예다움은 한국 장애인 고용공단에서 장애인 창업자에게 싼 이자로 대출을 해 주는 제도가 있어서 시작을 한 것인데 예상대로 운영이 되지 않아 빚만 지고 말았다.


백송이란 아호의 이력-


나한테 한복을 지어 주는 언니가 한문을 많이 아는데 소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예술에 대한 순수함을 지키라고 백송(白松)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 언니 덕분에 한복을 즐겨 입고 미장원에 가기 힘들어서 머리를 길러 쪽을 지는 건데 한국 자수 공예가로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듣는다.


지금은 백송이라는 호를 쓰지 않고 새로운 호인 혜인당(惠仁堂)으로 바꾸었다.


특허 등록의 시작-


내 작품을 자기 작품으로 둔갑시키는 사기를 당하고 나니까 내가 무지한 탓에 내 작품이 주인을 잃고 남의 집에서 가짜 이름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특허 등록의 필요성을 느꼈다.


넥타이, 발산 주머니 등 작은 제품도 모두 특허등록을 하였다. 이런 일들은 변리사를 통해 해야 해서 비용이 발생한다. 나는 행정적인 일은 모른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 장애예술인의 행정을 맡아 처리해 주는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장애예술인들에게 한고 싶은 말은 장애인이지만 자기가 노력 한만큼 결과는 얻어진다는 말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 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자수를 수놓아 살아온 이정희 궁수의 삶은 인간승리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장애를 갖고 있는 상태이면서도 한 땀 한 땀 수 에 대한민국 전통공예의 멋과 아름다움 그 속에 피어나는 예술의 세계는 지속적으로 계승되기를 위해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지원하고 응원해야 할 사명으로 다가오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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