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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Nov 25. 2019

슬라임의 첫 느낌

끈적함과 촉촉함 그 사이 어딘가.

내가 처음 만져본 슬라임은 문구점에서 ‘아이유 진주 슬라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아이유한테 허락은 받고 이름을 지은 것인지 의심되는), 천 원짜리 슬라임이었다.      


당시만 해도 슬라임이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할 때라 인스타에서 파는 수제 슬라임은 100 ML에 팔천 원에서 시작해서 만원이 넘어가는 것도 많았다. 손바닥만 한 장난감에 만원이라니!

슬라임 때문에 잠시 흐려진 내 이성이 거칠게 발길질을 하며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초딩들이 우글우글한 문구점 슬라임 매대에서 조카 선물을 사는 이모의 무심하고 뚱한 얼굴을 가장하며 슬라임을 계산대에 올렸다.      


내 가방에서 슬라임이 나오는 광경을 본 엄마도 뚱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윤이 주려고?”

“아니. 내가 갖고 놀 거야.”          


쟤가 결혼을 안 하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싶으면서도 그걸 애써 내색 안 하려는 엄마의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방문을 닫았다.

아이유 진주 슬라임를 추억하며 초창기에 직접 만든 진주슬라임

나는 성스러운 물건이라도 만지듯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조잡한 스티커가 붙어있는 슬라임 뚜껑을 열고 진주가 알알이 박혀있는 부연 슬라임을 집어 올렸다. (클리어 슬라임의 생명은 물처럼 투명함인데, 초창기 슬라임들은 다 부옇게 흐렸다.)


손 위에 올라간 슬라임은 자신이 어떤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한 것처럼 우유부단하게 손가락 사이로 유유히 흘러내릴 듯 맺혀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조물조물 오므리며 슬라임을 만졌다.      


뭐지? 이 말캉한데 매끄럽고, 부드러울 듯 끈적거리는 이 느낌은? 게다가 그 사이알알이 만져지는 진주의 촉감은 손끝이 지루할 틈을 없게 만든다! 유레카!!


나는 슬라임 동영상에서 본 대로 슬라임을 늘였다가, 합쳤다가, 꽉 쥐어서 손 사이로 나오게 하며 다양한 촉감을 느껴보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그 기쁨이 충만해지기도 전에 슬라임의 질감이 내 손 위에서 빠르게 변했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이 물체가 손바닥 열 때문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나는 뭣도 모르고 손에 붙은 슬라임을 휴지로 닦아 보겠다고 문질렀다. 닦아지기는커녕 휴지가 갈가리 찢어지며 손바닥에 달라붙은 슬라임 위에 덕지덕지 붙었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 같은 심정으로 나는 혼돈의 카오스에 빠졌다. 천으로 닦아야 하나? 물로 닦아야 하나? 그러다 하수구가 막히면 어쩌지?      


나는 그나마 살아있는 다른 쪽 손으로 ‘슬라임 닦아내는 법’을 검색했다. 슬라임이 한 번 옷에 붙으면 회생불가라 버려야 한다는 엄마들의 분노 가득한 후기와 슬라임을 하수구에 흘려보내면 막힌다는 예상 가능한 후기를 지나, <슬라임은 슬라임으로 닦아야 한다>는 현자다운 답을 얻었다. 슬라임은 손의 열기로 녹는 것이기 때문에 냉장고에 손을 잠시 넣었다 뺀 후, 작업을 하라는 꿀팁도 적혀있었다.


나는 냉장고에 손을 넣고 서 있는 딸의 뒷모습을 보는, (할많하않) 엄마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다시 방문을 닫았다.      


다른 손으로 통에 조금 남은 슬라임을 그러모아 스펀지로 톡톡 화장하듯, 차가운 손에 붙은 슬라임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진짜 이게 떨어져? 싶었는데 기적처럼 깨끗하게 슬라임이 슬라임에 붙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끌어당기는 것 같은 그 현상에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슬라임 초창기때의 작품. 작품명. '블랙크리스마스'

나의 첫 슬라임 경험은 실패였지만, 그 실패는 더욱더 큰 도전의 불씨를 낳았다.

하트가 5개라 더 중독될 수밖에 없던 애니팡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쉽게 다룰 수 없는  슬라임의 예민함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어른들도 쉽게 갖고 놀 수 없는 장난감이라니!

사람과 밀당을 하는 장난감이라니!

너 이 녀석, 내가 완전히 꺾어버리고 말 테다. 하는 말도 안 되는 정복욕이 불타올랐다.      


첫 실패를 싸구려 문구점 슬라임 탓으로 돌리고 정신승리를 얻은 나는 수제 슬라임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나는 대본을 쓰다가 막히면 핸드폰 게임을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게임 아이템으로 돈을 쓰나 수제 슬라임을 사나 쓰는 돈이 비슷한 것 같다는 합리적 생각의 결과였다. (그냥 사고 싶다고 말해!)


하루 종일 컴퓨터로 대본을 쓰다가 또 핸드폰 화면을 보며 게임을 하는 것보다, 슬라임을 만지는 편이 조금 더 눈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헬스케어적인 생각도 더해졌다. (그냥 사라, 제발!)      


그런데 막상 수제 슬라임을 사려고 보니 슬라임이라고 다 같은 슬라임이 아니라 그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했다. 안에 넣은 구슬과 파츠의 종류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풀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베이스가 달라지며 아예 촉감이 절대적으로 달라졌다.

베이킹이라고 다 같은 빵이 아니라, 어떤 건 식빵이 되고, 어떤 건 스콘이 되고, 어떤 건 마카롱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정말 생각지 못한 신세계가 아닌가?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그렇게 슬라임 덕후들이 빠져 들어가는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옷에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게 슬라임이니, 한 번 발을 담그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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