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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Nov 21. 2019

슬라임 계정을 파다

인스타그램 입성기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이가 들어도 SNS를 하게 되는 모양이지만, 방송작가로 프리랜서의 삶을 사는 나는 어느 순간부터 SNS를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싸이월드의 시대가 저물면서부터였다. 일촌 신청이 받아들여져야만 관계가 맺어져 서로의 게시물을 볼 수 있고, 댓글을 달 수 있는 폐쇄적 SNS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불쑥불쑥 전 남친이 친구 추천으로 뜨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페이스북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피드’ 형식도 어색했다.

싸이월드가 친구 집에 날 잡고 놀러 가 방문하는 느낌이었다면, 내 페이지에 들어가자마자 불쑥불쑥 뜨는 페이스북 피드는, 뭐랄까, 초대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아내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눈곱을 떼면서 방에서 나왔다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있는 낯선 사람들의 궁금하지 않은 일상과, 그들의 관심사가 주렁주렁 달린 링크 폭격을 맞는 꼴이라니! 그건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 나로서는, 요즘 10대 20대들이 모르는 사람들의 계정에 열심히 댓글을 달고, 댓글로 친구를 만들고, 댓글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낯 부끄러워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떻게 저렇게 얘기하지? 저런 관계가 의미가 있나? 아무리 익명이고 온라인이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저렇게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에 익숙한 이 세대는 나랑은 달라도 한참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겠구나 싶었다.      


직장인 대사는 술술 나오는데 대학생 대사가 어렵다!

대본을 쓰다 보니 그게 문제였다. 초딩 때부터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자란, 그래서 화면만 보면 무조건 터치가 되는 줄 알고 손가락부터 가져다 대는 그런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감성,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 그들의 말투, 관심사, 생활 패턴... 그런 것들을 통 모르니 내 대본의 주인공은 “뭐하삼?” 하고 아저씨처럼 묻고, “당근이지!” 라며 아줌마처럼 대답하는 23살이 되어 있었다. 오직 “대박!” 과 “헐!” 만이 프리패스처럼 아무 곳에나 갖다 붙여도 요즘 애들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의 언어였다.      


대본톤 때문에 고민하는 나에게 누군가 SNS를 하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SNS를 해야 시류를 탈 수 있다고 꼭 해보라고 했다. 페이스북이요? 했더니, 요새는 페이스북도 아닌 인스타와 유튜브의 시대라고 했다. (당시 내 폰에는 인스타그램 앱도 유튜브 앱도 깔려있지 않았다.)     


나는 모범생처럼 요즘 20대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핸드폰에 깔았다.

사진보다는 글 위주의 SNS에 익숙한 내가 보기에 사진 위주의 인스타그램과 영상 위주의 유튜브는 붕어 없는 붕어빵 같았다. 빵 하나를 구우려고 해도 나는 글과 사진으로 쭉 설명되어 있는 블로그를 보는 게 편한데, 요즘 애들은 유튜브 영상으로 보는 걸 더 좋아한단다. 뉴스 기사도 글로 읽지 않고 사진으로 된 카드 뉴스를 본다고 했다.


글 없이 사진만으로, 영상만으로 모든 게 다 전달이 된다고?

나는 미심쩍은 심정으로 인스타그램에 계정을 팠다. 우선 팔로우 수가 많은 셀러브리티들의 계정을 팔로우했다. 기웃기웃해봤지만 딱히 재밌지도 않고, 특별한 걸 발견하지도 못했다.   


인싸를 부르짖는 SNS 세상에서 나는 완전한 아싸가 되어 겉핥기식으로 인싸들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요즘 20대를 이해하기는커녕, 인스타그램도 이해를 못 한 채.      

 인스타그램에 올린 슬라임 영상

그러던 어느 날,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이상한 나라에 입성하듯 나는 슬라임 영상을 따라 인싸의 세계로, 인스타의 세계로, 유튜브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슬라임 영상에 덕통 사고를 당한 후, 나는 인스타그램에 ‘슬라임’이라는 키워드로 영상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슬라임에 처음 빠졌을 때만 해도 슬라임 유행의 초창기라 생각보다 국내 계정의 슬라임 영상들이 많지가 않았다.


손톱을 손가락만큼 길게 길러 화려한 네일을 받은 외국 여자들이 커다란 대야에 대용량 슬라임을 만들어 가지고 노는 슬라임 영상이 많았고 가끔 수제 슬라임을 파는 계정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슬라임 영상이라면 가릴 것 없이 전부 팔로우 버튼을 누르고 그 계정에 있는 모든 영상을 정주행 했다.


그런데 그렇게 무작위로 슬라임 계정들을 팔로우하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처럼 나를 대변하는 하나의 계정만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관심사별로 계정을 따로 파서 운영하는 게 묘미라는 것!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계정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1인이었다.)     


나는 당장에 ‘츄로슬라임’이라는 계정을 팠다. 계정을 만들 당시 로스가 먹고 싶어서 급조한 이름인데 이것이 나중에 사업자명까지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인생은 앞날을 알 수 없으니 무엇을 하든 신중해야 되는 법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츄로가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계정 팔 때 로스가 먹고 싶었어요.’라고 수없이 말하게 될 줄 누가 알았느냔 말이다!)     


지금은 탈덕상태인 츄로슬라임 계정

슬라임 계정까지 판 나는 도박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독자처럼 인스타그램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자기 전에도 슬라임 영상을 두세 시간씩 보는 날이 늘어갔다.      


‘이건 너의 인생에, 너의 커리어에, 너의 자기 계발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거야. 니가 평소에 말하듯이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안 들리니?’     


평소에는 그렇게도 뚜렷하게 들리던 이성과 실용주의적 사고의 외침이 희미하게 멀어졌다.  나의 오감은 슬라임의 미적 아름다움과 귀를 간지럽히는 ASMR의 쾌락에 빠져 점점 더 깊은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는 것도 좋고, 듣는 것도 좋지만, 슬라임은 만져봐야 제 맛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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