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se Nov 04. 2024

세모난 당신과 네모난 내가

떨림의 농도


- 아, 그래요 그럼.

오늘도 내 입에서 기어이 이 말이 나온다. 말 끝에는 옅은 웃음도 따라붙는다. 분명 배려심 많고, 유순한 듯 보이는 사람이지만 가끔 내 기준으로 '그래?' 싶은 상황들에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중요한 일이 아니거나, 중요한 일이거나 한 이유로 난 그런 그를 꺾을 마음을 먹지 않는다. 뭐든, 적당한 것을 골라 그가 그렇게 하겠다 마음먹은 일일 것이므로. 그저 왕왕 마주하게 되는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사람과 나는 참 잘 맞는 것 같다고, 그런 이유로 기쁠 뿐이었다.


이를테면 고집불통과 똥고집이 만난다는 느낌이었나. 우리를 아는 지인들은 처음에 내심 걱정이 되었던가 보다.

- 아이고, 둘 다 고집 피우지 말고, 싸우지나 말아라.

나도 고집이 센 편이다. 백번 생각해 봐도 이건 이게 맞지, 하는 나만의 확신을 갖고 있는 일이라면, 상대가 들이받아도 쉽사리 쓰러지지 않는다. 어디 끝까지 가서 결론을 보자는 마음으로 맞선다. 그래서 들이받지 않아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도 된다.


- 그냥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 응, 그렇긴 한데, 일단 보려고.

- 그래요. 오빠가 뭐 내가 말한다고 바꿀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 생각하고 결정할 테니까.

나의 퇴근 시간이면 언제나 집에 도착해 있는 그 사람과 퇴근길에 한 짤막한 통화 내용이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그 사람이 '왔어?' 하는 듯한 눈빛만 보이고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침대 구석으로 훽 고꾸라진다. '힘들었지? 수고했어.' 다정한 인사말과 함께 긴 포옹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싶다.

- 어 뭐야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쭈구리야?

뒤돌아 누워 있는 그 사람을 꼭 끌어안으며 달래듯 말했지만 어째 대답이 없다. 그렇게 누워 잠시를 있어 보다가 그를 돌아 눕혀 팔베개를 해 얼굴을 짓눌러 안아버렸다.

- 나 뭐 잘못했어? 말해봐아. 내가 사과하고 풀어줄게.

- ...너 아냐, 내가.

- 그런데 왜 오빠가 삐친 척을 했어. 치사해.

말하며 자세를 바꿔 내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 사람의 팔로 내 머리를 끌어안도록 만든다. 이제 이유를 말해 줄 차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 내가... 평소에도 그렇게 네 말을 안 들어? 네가 뭐라고 하든 안 듣고, 내 마음대로 해버려?

또 웃음이 났다.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했을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아서 웃음소리는 치워둔다.

- 응, 맞지. 오빠 생각이 나랑 다를 때는 그러지.

그 사람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의 얇은 몸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준다.

- 그런데 그거 안 싫은데 나는. 그런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 좋아. 오빠가 그렇게 하는 일들은 오빠 스스로 결정해야 할 때뿐이지, 나랑 같이 상의해야 하는 일들은 항상 나한테 양보하려고 하면서.

조금 안도가 되었는지 내 머리를 힘주어 안고 있던 손을 슬쩍 풀어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나는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날을 세우면 더 날카롭게 날을 세워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굴던 나를 조금씩 무딘 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그가 건네오는 말들은 나를 치료하고, 분에 넘칠 만큼 다정한 것들이라 나의 모서리들 중 하나쯤은 마모되어가고 있다고, 둥글어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말을 반성한다.

- 아까 전화로 한 말, 비꼰 거 아니고, 서운하다 표현한 거 아니고, 말 그대로였는데. 혹시 내 말 때문에 걱정했으면 미안해요. 혹시 내 말에 긁혔으면 정말 미안해. 앞으로 더 예쁘게 말할게.


어떤 것도 감수하려 하지 말자고 했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너무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면 한다고.

그저 자신의 인생을 살던 그 사람과 내가, 각자가 갖고 있던 성질 그대로를 좋아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한 지점부터 손잡고 걷게 되었을 뿐이다. 맞잡은 반대편 손에 말고삐를 쥐고 걸을 수도, 손가락 쫙 펴고 지나는 바람을 가르거나 나뭇잎 따위를 만지작 거리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내 취향과 같을 필요는 없다. 그의 저쪽 손에 쥐어진 것이 가시 돋친 장미라 하더라도, 피가 송골송골 맺힌 손으로 내 뺨 한 번 어루만져 준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 될 거라고.


그러니, 그리 걷다 갈림길을 맞닥뜨렸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같이 갈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강하게 잡아 끄는 쪽으로 다른 한쪽이 딸려가 준다면, 또 그렇게 그 방향으로 손잡고 차박차박 걸음을 옮기면 된다.

한 손엔 강아지풀을 뱅뱅 돌리며.




작가의 이전글 내가 지켜줄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