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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Aug 05. 2024

필름실을 열다




  ‘–님’으로 부르는 사이였지만 그 사람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람을 향하는 글이었지만 그 사람 모르게 썼다. 나의 글 속에서 우리가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말을 놓은 사이인 듯 그 사람을 너로 부르곤 했다.  

  더는 필름이 감기지 않았다. 필름 빼는 영상을 찾아 와인더 레버를 되감았다. 혹시나 그동안 찍은 사진들이 전부 날아가 버릴까 봐 레버가 헛돌기 시작한 후로도 스무 번이 넘게 되감았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만 같을 때 필름실을 열었다. 


  #1

  밤새 눈이 내렸던 지난겨울 아침. 네가 자는 동안 밤을 지새운 나는 창틀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베란다 문을 열고 창 앞에 섰어. 참 오랜만에 세상에 내린 눈을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을 봤어. 잠을 자야 했지만 책상 위 먼지 쌓인 필름 카메라를 집어 들고 필름을 감았어. 구매한 지 제법 되었지만 처음 감아보는 필름과 조리개 노출값까지 아주 서툴렀지. 그 지루한 과정을 고맙게도 눈은 기다려주었어. 

  

  1970년대에 생산된 카메라 올림푸스 PEN EE-3에 이미 꽤 오른 필름 값보다 더 값이 나가는 KODAK VISION3 500T 영화용 필름을 넣었으니 기대가 컸지. 손목 스트랩을 왼손에 걸고 방충망을 열었어. 숨을 전부 내쉬고 도로 삼분의 일 정도 들이마셨어. 군대에서 몸에 익어버린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까지의 사격루틴이 나와버릴 만큼 첫- 그리고 한 번의 샷이 신중했던 거였지.  


  창문 앞에서 카메라 바디 금속 부분을 잡고 있다 보니 손이 얼어갔어. 손가락들이 아려올 때쯤 모나미 볼펜에 튀어나와 있는 것만 같은 검은색 셔터를 눌렀고 소리를 들었어. 첫 셔터 소리였지. 특별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얼어버린 손이어서 그런지 셔터 감각은 생생했어. 셔터 아래로 수축하였다가 다시 팽창되는 스프링이 느껴졌어. 제법 오랫동안 손이 얼어있던 탓에 셔터 스프링 그 감각이 오른손 검지에 달라붙어 있었어. 손에 온기가 돌면 녹아버려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겠지만 조금 아쉽기도 해. 출근 잘해.


#2

  안경에 김이 유난히 서린 어제였어. 어딜 그리 뻘뻘 돌아다녔는지 숨을 몰아쉬다 습해진 마스크 속 답답한 숨들은 좁을 틈을 비집고 나와 안경에 들러붙었어. 나의 왼손은 아이폰보다 펜삼이(올림푸스PEN EE-3 애칭)를 더 쥐고 있었어.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카메라 보디 금속 부분을 쥐고 있어야 했는데 손이 아려왔어. 지금 이 메시지를 적고 있는 터버린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두었어. 손등이 따끔거려. 이런 적은 군대 이후로 처음인듯싶어. 꽤 의욕적이었나 봐. 두 손은 본능적으로 따듯한 기운을 찾아 파고드는 혹한 속 야전의 병사 같아. 이 계절은 자꾸만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내게 하는 장난을 자주 걸어와.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눈 내린 곳곳을 찍게 하고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연거푸 생각나게 해서 손을 꺼내 휴대전화 메모장을 켜곤 했어. 이번 겨울은 자주 이럴듯해. 


  #3

  겨울이 지나 눈이 사라져 버린 후에 한동안 카메라를 들지 않았어. 겨우내 서 있던 자리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간 눈사람은 봄의 목을 축여 싹을 틔웠고 만개한 벚꽃 나무에서 꽃비가 내리는 날이 돼서야 나는 카메라를 챙겨 나갔어. 봄날 볕이 드는 곳에서 뷰파인더로 그날의 봄에 펼쳐진 풍경을 담아 셔터를 눌렀어. 꼭 담고 싶었던 건 가지에서 떨어진 꽃잎이 땅에 닿기 전 나의 시선과 비슷한 위치에 가닿는 순간이었어.  


  스튜디오에서 영화용 필름은 현상에 시간이 더 소요된다고 했어. 처음 다뤄보는 물건으로 처음 하는 일이라서 무슨 문제라도 생겨 계절의 사진을 단 한 장도 못 건지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어. 주말이 지나 받은 스캔본들은 처음 한 일치고는 꽤 괜찮았어. 사진을 넘겨보며 계절의 피사체들을 만났을 당시의 소리와 온도가 뇌리를 스쳐지나가. 그런데 봄날의 몇몇 사진들은 빛이 너무 많이 들어와 계절 고유의 색을 찾기 어려웠어. 빛이 없었다면 사진찍기가 어려웠겠지만 또 너무 많아져 버리니 곤란해져 버린 거지.  


  문득 가을 홍시가 생각났어. 감을 익게 하는 건 여름의 뙤약볕인데 익은 감을 달고 부드러운 홍시로 성숙시키는 건 가을볕의 따스한 시선일 것 같아. 내가 너를 한여름 햇살처럼 너무 뜨겁게만 본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야. 문득 고갤 들어 너와 눈이 마주치면 넌 가을볕처럼 나를 바라봐 주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 글에 모든 계절이 들어가 있네. 너를 처음 만난 계절을 지나 조우하는 모든 계절에 걸쳐 네 생각을 했어. 


  이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처음 셔터를 누른 지난겨울 아침에서부터 벚꽃 비 가득 내리는 봄에 더는 필름이 감기지 않은 날까지의 단편이야. 너에게 전하고 싶었어.



                                                                                                               -  쥰 세 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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