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쥰세이 Jul 22. 2024

길어진 그림자만큼만 이라도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엠티의 밤이 익어가는 술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건넛방으로 들어간 내가 잠에서 깨어 진실게임을 듣고 있는 줄은.  


  그녀가 질문을 받았다. 

“우리 모임에서 이성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있다?”  


남녀가 모이는 곳에 어김없는 질문이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게임 소리에 자다 깨기를 반복하느라 몽롱했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이 떨려왔다. 대답을 기다리며 숨소리마저 줄였다.  


그녀가 말했다. 

“있다…” 


불 꺼진 방에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녀가 이른 항상 다정했다던 사람이 나이기를… 그 사람이 꼭 나이기를… 바랐다. 새카만 십이월의 밤 한구석에서 산속 펜션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빛은 내가 누워있는 캄캄한 방 닫혀있는 문틈을 전부 채우고 문지방 경계를 넘어 바닥까지 흘러들어와 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녀에게 근사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간 그 사람이 나였다면… 만약 나였다면… 아마 그때부터였지 않았을까. 


  백열등 빛이 내리던 술집을 나와 자리를 옮기던 길에서였다. 토요일 저녁이었지만 그 계절 바람처럼 한적한 합정동 거리였다. 혼자 걷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 번째 모임 이후로 관심을 기울였던 그녀의 글 속에서 본 살아온 삶과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단상을 말했다. 대화를 이어가던 우리는 조금씩 무리에서 뒤처졌다. 그녀의 눈은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계절을 닮았다. 두 눈에 볕이 유난히 더 드는 것만 같은 가을 색 눈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반짝이는 눈으로 배시시- 웃어주는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듯 그녀와 눈이 스쳐도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마주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되어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밤거리를 걸으며 마주한 눈에는 잔잔한 물결이 아른대는 것만 같다. 두 눈 속엔 달빛 일렁이는 윤슬이 있었다. 난 그걸 보는 게 좋았다. 해와 달의 빛이 되비치는 그 반짝거림이 좋았다. 


  일행에게서 더 뒤처졌지만 둘 중 누구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앞선 무리가 이미 건너간 횡단보도에는 점멸하는 초록 불 아래 보행 신호 숫자가 줄어간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을 잡아서는 안 될 것만 같아 손목을 덮은 코트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뛰었다. 진입하는 차량에 손을 내밀어 양해를 구했다. 걸어오는 길에서 둘이었던 그림자가 내가 잡은 손으로 하나가 되어버린 횡단보도였다. 멈추어 선 차량 전조등에 비추어져 길어진 그림자만큼만 이라도 이 횡단보도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새 술집에 도착했다. 기차 탑승 시간이 머지않은 나는 입구 앞에서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깡충깡충 뛰며 활짝 핀 내 손에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짝- 무려 세 번이나. 모임에서 언제나 명랑한 그녀였지만 그토록 밝은 모습은 처음이다. 달곰한 표정을 들킬까 봐 후드를 뒤집어쓰고 돌아섰다. 어떤 시선이 내 뒤에 가닿는 것만 같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함께 걸어 온 길로 되돌아갔다. 홀로 걷는 이 길이 혼자 걷지 않는 것만 같다.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에는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였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아도 걷는 내내 따듯했다. 대체로 차가운 내 손에 닿은 세 번의 따스함이 가득히 스미어있다.   


  여러 지하철역과 기차역을 지나 집에 오는 길이었다. 이 길 위에 나는 없다. 아직 그 길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따듯한 물로 목욕했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어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에 배고 천장을 봤다. 천장에서 잠이 내려앉는듯 했다. 끔-벅거리는 눈을 아주 감아버리고 나는 바랐다. 잠시나마 같이 걸은 거리에서 서로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기를. 줄어가는 보행 신호 아래 줄어져간 건 둘 사이의 간격이었기를. 손을 잡고 건넌 건 둘 사이에 있는 경계였기를. 그날 밤 아주 먼 거리를 둔 다른 공간에서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기를 바랐다.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져가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이전 02화 두  눈 에  반 했 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