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는 한 통이 도착해 있다. 메일함을 열어본 화요일 저녁이었다. 예정된 메일을 열자마자 본문을 제쳐두고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거듭 내려 볼드처리 되어있는 글감을 본다. 보자마자 곧바로 주제나 글을 구성할 문장이 생각난다면 그 주는 꽤 운이 좋다. 그러나 운이 좋은 주는 거의 없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서 쉬이 이어지지 않는 단어를 접할 때면 어떤 이유에서 이 글감이 정해졌는지 메일 본문을 읽는다. 다 읽고 한 번 더 읽어본다. 한숨이 나왔다. “하- 이번 주도 쉽지 않겠군…” 책상에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거기서부터 시작인 셈이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은 케이지 자물쇠를 풀어 문을 활짝 연다. 두 의식의 사냥개들을 풀어 놓는다. 글감 냄새를 맡은 개들은 며칠 밤낮에 걸쳐 글을 구성할만한 것들은 뭐든 물고 온다. 그때는 주로 손을 쓰기 곤란하거나 정신줄을 놓을 무렵이다. 가령 설거지를 한다던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 싫을 만큼 시린 겨울에 거리를 걸어갈 때나 샤워기에서 내리는 물에 샴푸를 씻어가는 순간이었다. 잠이 들어갈 즈음에도 구미를 당기는 문장을 내보인다. 돌아 누어 화장대 위에 놓아둔 노트 위 펜을 들어 적으면 될 일이지만 그 한 번 돌아눕는게 쉽지 않다. 겨우 몸을 돌려 노트에 휘갈기고 잠이 든다. 다음 날 낙서 같은 문자를 해독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꽤 쓸만한 구절을 얻곤 한다.
마주하는 의식과 무식을 샅샅이 뒤져도 그들이 내 앞에 내려놓는 건 거진 비슷했다. 그 사람. 그 사람에 관한 나의 단상이었다. 낯선 글감을 받아도 익숙한 사람을 쓰는 글이었다. 여러 가지 글감에도 나의 글은 한 사람을 써 갔다. 알 수 없다. 언제까지 그 사람 곁을 서성거리는 글을 써갈지. 그 사람을 만난 건 다섯 번뿐인데 써지는 글은 늘어만 간다. 매주 다른 글감을 받아도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찾게 된다.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써보고 싶다. 지난 일들을 더듬어 닿는 기억을 꽉 붙잡는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 호프집에 십여 명이 들어갔다. 두 번째 모임을 마치고 이어지는 뒤풀이 자리였다. 종업원은 띄어져 있는 테이블 몇 개를 붙여 우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평소 화장실을 편하게 다니고 싶어 테이블 가장자리에 자주 앉았지만 그날은 무리에 밀려 가운데 상석에 앉게 되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찰나에 나의 눈은 커졌을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어진 두 번째 모임에서 노트에 연필로 작성한 글을 그 사람의 음성으로 읽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제야 그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무언가 쓰고 낭독하는 사교모임에서 였다. 기대하고 나갔던 첫 모임에서 처음 보는 열댓 명의 사람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낭독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에 내 말소리가 채워지며 정숙해졌다. 글을 읽어 내려가면 서른 개의 귀가 나의 글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낭독이 시작되는 순간 의지할 곳 없이 오로지 내 목소리로만 적막을 덮어가는 건, 막 읽은 있는 문장 마침표와 이제 읽어야 할 문장 첫음절 빈 자리 마다 떨리는 숨소리가 채워지는 걸 여러번 들어갈 만큼 짐스러운 일이었다. 전부 읽어 내면 토요일 등교 후 과업을 마치고 진정한 주말의 문을 열어젖히는 듯한 소년기의 만족감이 있었다. 첫 모임에서 타인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전부 자기소개를 했고 각자의 글을 읽었을 텐데 적어도 그 사람에 관한 인상은 없었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나는 그 사람에게 두 눈에 반했다. 그제야 알아본 것이었다. 나는 말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두에게 하는 우스갯소리 같았지만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지만 곁눈으로 그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화장실은 이 층에 있었다. 거울 속 엷붉은 얼굴은 들떠있었다. 술에만 취해 있는 게 아니었다. 모은 두 손에 수돗물을 받아 입을 헹궈냈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달뜬 감정을 가라앉히려 해봤다. 화장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반쯤 내려가던 계단으로 그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를 넘어가는 긴 웨이브 머리에 연두색 스웨터와 데님팬츠를 입고 있는 모양이 어느 곳에 있었어도 새내기 같은 푸릇한 모습이었다. 고갤 든 그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그 사람은 눈과 입에 웃음을 지어 고개를 아래위로 가벼운 인사를 해줬다. 나도 그렇게 했다. 계산을 마치고 알근하게 취해 호프집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른 곳에 가자는 말이 나왔다. 그 사이에서 작은 캔디를 꺼내 일일히 나눠주고 있는 그 사람을 봤다. 수줍게 또 바삐 캔디를 나누어 주는 모습은 나를 빙긋이 웃게 했다. 받은 캔디를 입에 넣었다. 시월의 밤바람과 달금한 향이 입안에 불었다.
내선순환 열차에 올라 문 앞에 섰다. 창문을 꽉 채운 지하의 어둠은 동영상 플레이어 빈 화면처럼 검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 창 밖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어 설치된 전등이 허연 불빛을 낸다. 점점 빨라지는 열차가 선로 옆 콘크리트 기둥을 지나며 기둥에 가려져 있다가 나타나는 불빛은 깜빡거리듯 보인다. 뚜렷하지 않지만 이는 나에게 신호 같다. 그 깜빡거림은 시그널이 되어 이 열차에 타기 전 장면을 재생시켰다. 보이는 건 조금의 흐림 없이 맑은 두 눈과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몇 시간 전 뇌리에 남겨진 또렷한 눈을 내 의식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그 사람 눈 깜빡임에 슬로우가 걸렸다. 눈꺼풀이 닫히기 전까지 내가 본 건 짙은 무늬가 감싸고 있는 어떤 행성같은 갈색 홍채였다. 의식의 귀로 다시 들어본 목소리는 상냥하고 명랑했다. 출력되는 사운드에 귀가 잠기면 말하는 입술에 싱크가 맞지 않는듯 했다. 소리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핑크색 틴트가 발라져있는 입술이었다.
열린 지하철문으로 내린 승객들 뒤로 탑승객들이 들어왔다. 그곳에 다녀오면 여러가지가 채워졌다. 나의 목소리가 적막을 메웠고 문장과 문장사이를 떨고 있는 숨이 그랬다. 콘크리트 기둥과 기둥 간격마다 빛이 들었다. 지하철 문 앞에 서서 발하는 여러 전등 빛을 스쳐가며 내 안은 그 사람으로 가득찼다. 종종 의식이 나의 상념을 들추갔지만 연한 전등 빛줄기가 눈에 닿으면 무의식이 그 사람으로 의식을 다시 채웠다. 거듭하여 도는 내선순환 열차에 기대서서 가는 내내 그 사람이 반복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