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지 못한 이야기

페스트 by 알베르 까뮈

by 보노

중간에 읽기를 포기한 책은 오랜만이다. 20대에는 굉장히 산만한 독자였고, 항상 여러 권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는 꽤 많았다. 흥미는 자주 바뀌고 읽고 싶은 책은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읽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몇 책은 그만 읽고 나중에 읽기로 마음먹고선, 책장에 꽂아두는 경우가 많았다(이대로 끝이다. 당연히 안 읽는다).

읽기 시작한 책을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은 지금도 없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끝까지 읽는 편이다. 책을 읽는 시간도 많이 줄었고, 책을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많이 줄었기 때문에 책 하나를 선정하는데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웬만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중간에 포기하는 책이 나왔다. 그것도 소설이다. 소설이라면 결말이 궁금해서라도 꾸역꾸역 끝가지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정말 아니었다. 읽는 내내 시간만 버리는 느낌만 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만 읽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도대체 <페스트>는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중간에 포기하게 된 것일까?


독해력을 한참 넘어서는 긴 문장


종종 장문을 즐겨 쓰는 작가가 있다. 까뮈가 그렇다. 프랑스어 원문을 본건 아니지만, 몇몇 번역본을 살펴본 결과 눈에 띄게 장문이 많았다. 단문이 읽기 편한 건 사실이지만, 장문이라 해서 반드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장의 이해는 길이에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역량에 의존한다. 아무리 길어도 이해하기 쉽게 쓰는 작가도 충분히 많다.

단문은 속도감 있고 이해가 빠른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문만으로 나열된 글은 단조로워서 밋밋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반면에, 문장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잘 쓰인 장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에 풍기는 매력도 느낄 수 있다. 빠르게 읽기 힘들지는 몰라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음에 새기기에는 장문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페스트>에서 발췌한 아래 문장을 보자.


어머니와 자식, 부부, 연인들은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저 일시적인 이별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의 플랫폼에서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남기고는 서로 키스를 주고받았으며, 며칠 또는 몇 주일 후에는 다시 보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그 작별로 과히 낙심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일을 하던 그들이, 대번에 호소할 길도 없이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지도 못하고 편지 왕래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 더 보자.


그런데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러 그 재화가 이 도시에 덤벼들어서 결정적으로 점령해버리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동안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꼭 적어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시 자기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또 그들이 모든 타격에 맞서서 지키기 있는 그들 자신의 몫을 페스트로부터 되찾기 위해서 퍼부은 절망적이고도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들이다.


어려운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호흡이 너무 길다. 그래서 한 번에 이해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나만 그런가?). 이런 문장이 소설 전반에 걸쳐 곳곳에 등장한다. 잘 읽다가도 이렇게 긴 문장이 나타나면 흐름은 뚝하고 끊기고 만다. 이럴 때는 문장을 이해하려고 여러 번 읽는다. 그런데, 문장을 자꾸 읽다 보면 이전에 뭘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 이 전 내용도 다시 읽어본다. 악순환이다. 이렇게 다시 읽는 문장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난다면 글 읽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내용은 이해도 안 되고, 진도도 안 나가는데 당연히 그만 읽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지 않을까?


문장의 이해는 그 문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앞뒤 문장 과의 연결, 문장이 포함된 문단, 그리고 이야기 전체의 문맥, 모두 중요하다. 그래서 흐름이 한번 끊어지면,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어쩌면, 번역본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어 원문이 아니라 번역가가 재창조한 문장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번역가의 역량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단문으로 쓰인 글이라면 번역이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페스트와 같이 장문이 많은 글은 조금만 잘못 번역하더라도 이해도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차라리, 프랑스어를 잘했더라면 생각보다 내용을 쉽게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과 직업, 그리고 대명사의 혼란스러운 사용


페스트를 읽다 보면 한 인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여럿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정오에 의사 리외가 자기 집 앞에다 차를 세웠을 때, 길모퉁이에서 수위가 고개를 숙이고 팔다리를 휘청거리며 마치 인형 같은 자세로 가까스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의사도 아는 한 신부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파늘루 신부였다. ... 리외는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미셸 영감은 눈을 번뜩이며 쌕쌕 숨을 쉬고 있었다. 영감은 몸이 별로 안좋아서...


처음에는 수위라고 지칭한 다음, 노인으로 변경한다. 나이가 있는 수위니까 노인이라고 지칭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그다음 문장에서는 미셸 영감으로 변경된다. 한 문단에서 한 인물을 지칭할 때 세 가지 단어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수위, 노인, 영감, 그리고 이름인 미셸.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빠르게 글을 읽다 보면 변하는 단어 때문에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는, 페스트를 읽는 동안 도무지 인물의 이름과 직업이 매치가 되지 않아, 인물을 소개하는 글을 찾아보기도 했다.

하나 더 보자.


코타르의 부탁으로 의사는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 앞에 차를 세웠다. ... 그런데 그중에 빗질을 잘해서 착 달라붙은 검은 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때가 묻은 한 아이가 그 맑고 겁먹은 눈초리로 리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사는 눈길을 돌렸다. 코타르는 인도에 서서 의사의 손을 잡았다. 판매 대리인은 두서너 번 등 뒤를 돌아보더니 목이 쉬어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들은 늘 그러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라고 리외가 말했다.


주인공 리외는 의사다. 의사가 몇 명 더 나오긴 하지만, 대체로 의사라는 단어는 리외를 지칭한다. 그래도 의사라는 단어와 리외라는 이름이 여러 번 번갈아가며 사용되는 건 그리 반갑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등장하는 판매 대리인은 다름 아닌 코타르다. 코타르가 판매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문장의 연결이 다소 어색한 건 사실이다. 위 내용은 다음과 같이 바뀌면 어떨까?


판매 대리인 코타르의 부탁으로 리외는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 앞에 차를 세웠다. ... 그런데 그중에 빗질을 잘해서 착 달라붙은 검은 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때가 묻은 한 아이가 그 맑고 겁먹은 눈초리로 리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리외는 눈길을 돌렸다. 코타르는 인도에 서서 리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두서너 번 등 뒤를 돌아보더니 목이 쉬어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들은 늘 그러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라고 리외가 말했다.


주인공 리외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여러 곳에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의사라는 단어는 모두 리외로 변경해주었다. 그리고 판매 대리인이라는 직업은 코타르가 처음에 등장할 때 붙여주었다. 그다음에는 이름이나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해 코타르를 지칭하도록 바꿔 주었다.




고전이라고, 베스트셀러라고 항상 나한테 맞는 책은 아니다. 흥미와 관심사, 그리고 내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야 비로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까뮈의 책을 한 번쯤 읽고 싶어서 골라봤지만, 다른 작품(<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등)도 <페스트>와 비슷하다면 굳이 읽어볼 마음은 없다.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 남들이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남들의 취향에 휘둘리지 말자. 대부분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그것보다는 자기가 정말 좋아하고(어떤 분야든 상관없이, 무협지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게 낫다. 책이라는 건 결국 어떤 종류의 재미를 느끼기 위한 행위인데, 이 행위로 인해 굳이 고통 받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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