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감는새 연대기 by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새 연대기>를 다시 읽었다.
벌써 세 번째. 5년 정도 전쯤 마지막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읽어보려고 마음먹었을 때, 어떤 이야기인지 떠올려보았다.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전에 읽었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줄거리는 기억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단편적인 장면만 드물게 생각날 뿐,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할 수 없었다. 사실 단편적으로 떠오른 그 장면 조차 불확실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인지 아니면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인지 헷갈렸다. 하루키 소설은 읽을 때마다 이런 혼란함을 느낀다. 분명 처음 읽는데 이미 본 것 같고, 다시 읽는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다. 마치 재즈 음악과 같다. 매번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매번 다른 곡처럼 들린다. 그날그날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완전히 다른 소설로 변모한다.
‘태엽감는새’는 원 제목이 아니다. 원 제목에는 ‘연대기’가 뒤에 붙는다. 그런데 왜 한국에 처음 출간할 때 ‘연대기’를 제거했을까? 제목은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작가가 아무렇게나 정했을 리 없다. ‘태엽감는새’와 ’태엽감는새 연대기’는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새’에 초점을 맞추고 후자는 ‘연대기’에 초점이 맞춘다. ‘태엽감는새’는 구체적 대상을 지칭하므로 독자는 그 자체에 어떤 상징이 있다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연대기’라는 단어가 뒤에 붙으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추가된다. 그리고 ‘태엽감는새’는 시간 사이의 매개체로써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제는 그 자체의 상징보다는 매개체로써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었을 때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어린 시절엔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그런 책이 있다. 내게는 <태엽감는새 연대기>가 그런 책이다. 처음 읽었던 20대에는 그저 멋있어 보이는 표현과 매력적인 등장인물 등, 표면적인 요소에 끌렸다. 우물이 왜 중요하고,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고, 태엽감는새가 뭘 의미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툭툭 던지는 철학적인 표현과 대사에 매료되었고, 그게 전부라 생각했다.
글 쓰는 입장에서 다시 읽어본 이 책은
하루키에 대한 내 평가를 완전히 뒤바꿨다. 특히, 인물과 상황과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눈에 띄었다. 묘사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서사만 나열하는 식의 소설은 재미없고 지루하다. 내용을 전달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면 몰라도 소설을 쓰고 싶다면 묘사에 뛰어나야 한다. 잘 쓰여진 인물 묘사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잘 쓰여진 상황 묘사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잘 쓰여진 심리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든다. 그만큼 소설에서 묘사의 비중은 상당하다. 만약, '태엽감는새 연대기'에서 묘사를 제거하고 서사만 남긴다면 아마 한 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구미코 옆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여자에 대해 과연 뭘 알고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 구미코는 곤히 잠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파란 화장지와 무늬 있는 휴지와 소고기와 피망 볶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줄곧, 그녀가 그런 일을 참아 내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채 살아왔다. (...) 나는 그 사건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목구멍에 걸린 생선 잔뼈처럼, 그것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 어쩌면 그 일은 실제로, 뭔가 훨씬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일의 시작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구미코 만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새까맣고 거대한 방을 상상했다. 나는 조그만 라이터를 쥐고 그 방안에 있었다. 라이터의 불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방의 미미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키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할 때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상황과 주인공의 생각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기쁘다', '슬프다'처럼 직접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을 제거함으로써 감정이 과잉을 방지한다.
하루키의 소설은 마치 꿈속 세계 같다. 비현실적인 일로 가득하다. 꿈속에서 만난 여자와의 섹스는 현실의 의식에서 연결된다. 우물에 내려갔다 올라오면 한쪽 뺨에 시퍼런 멍이 드는가 하면, 우물을 통해 의식의 세계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행한 행동은 현실세계에 실제로 반영된다.
하루키의 소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거나 분석하려 시도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은유와 상징을 전부 이해하려 들면, 독자는 혼란에 빠지기 쉽다. 1권의 부제인 '도둑까치'는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까치 서곡>에서 따왔다. 이 음악이 과연 첫 번째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냐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태엽감는새와 도둑까치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다. 태엽감는새는 세상을 똑바로 돌아가도록 계속해서 태엽을 감는다. 반면에 로시니의 음악 속 도둑까치는 실제로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다. 둘 다 새면서 하나는 선한 존재며 또 하나는 악한 존재다. 태엽감는새가 주인공 오카다 도오루 라면, 도둑까치는 구미코의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다. 물론 로시니의 도둑까치를 와타야 노보루에 온전히 대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에 등장하는 까치가 도둑인 것은 틀림없지만, 악한 의도를 가진 행동은 아니었다. 와타야 노보루가 악한 사람이냐 묻는다면 쉽게 답하긴 어렵겠지만, 구미코와 구미코의 언니, 그리고 가노 크레타에게는 악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번역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2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다시 번역했음에도 몇몇 단어는 눈에 거슬린다. '훼손'이라든가 '기묘하다'는 식의 표현이 너무 자주 등장한다. 아마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훼손이라는 말은 ‘손상되다’나 ‘망가뜨리다’ 같은 표현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 그럼에도 ‘훼손’이라는 표현은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훼손'은 한글로 쓰인 소설에서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수영은 내 인생에 생긴 멋진 일 중 하나였다. 그것은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뭘 훼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뭔가에 훼손되는 일도 없었다.
'기묘하다'는 말은 주로 사물의 모습이 이상함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만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상하다’, ‘기이하다’, ‘묘하다’ 등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부분에도 굳이 ‘기묘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독자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그것이 움직임을 멈추면 멈출수록, 그 세계가 기묘한 일들과 기묘한 사람들로 넘쳐 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 그러나 나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움직임을 멈추면 멈출수록, 그 세계는 이상한 일과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감’은 이 소설뿐 아니라 다른 하루키 책(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실감’은 주로 ‘실감 나는 이야기’와 같은 식으로 사용하는데, ‘실감이 일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자신들이 지금 여기에서 진짜 호랑이를 사살했다는 실감이 일지 않았다.
=> 자신들이 지금 여기서 진짜 호랑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