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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Sep 21. 2020

어떻게 나는 개발자가 되었을까?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건축, 오로지 건축


지금 떠올려보면, 20대 초반의 나는 외골수였다. 건축이라는 단 한 가지 길만 생각했고, 다른 길은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다. 미래의 나와 상상 속의 나를 동일시했다. 믿으면 이뤄지리라 생각했고,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쏟아붓지는 못했지만,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은 노력했다. 졸업할 때가 되자, 동기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나처럼 건축가가 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금융권, 의전(의학전문대학) 등 전공과는 무관한 선택을 하거나 대기업 건설사에 취업한 동기도 꽤 많았다. 건축설계가 연봉이 낮고 힘들다는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의 돈은 선택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힘든 만큼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원했던 대로, 설계사무소에 입사했다. 일은 고되고,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퇴근 후에 뭔가를 배울 생각도, 주말에 어딘가 놀러 갈 생각도 내게는 사치였다.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소장(부장 정도의 직급)님의 입에서 퇴근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과한 업무와 휴식 부족은 몸을 늘 피로하게 만들었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들어오면 씻자마자 잠에 빠졌다. 내일 일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 둬야 했다. 집은 오로지 잠을 자는 곳일 뿐이었다.

일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내 선택을 잘못했던 걸까? 월급이 더 적더라도 건물을 직접 지어볼 수 있는 설계사무소에 갔어야 했던 걸까? 그랬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모형과 프레젠테이션 만드는데 온전히 하루를 바치는 모습은 책에서 보던 건축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우던 이상적이고 고상한 건축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괴리감만 커질 뿐,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게 현실인가 싶었다. 현실의 건축은 학교의 그것과는 다른 게 정상이구나 싶었다. 버티기 위해선 합리화가 필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대기업 건설사를 갈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최소한 보상이라도 나았을 테니까.



사회를 위하는 일, 사회적 기업


확신했던 미래는 모래로 쌓은 성이었다. 누적되는 피로와 비어 가는 통장잔고, 그리고 일에서 느꼈던 실망감은 나를 탈(脫) 건축으로 이끌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회에 이롭고, 돈도 벌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때마침 대학시절 친했던 친구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머지않아 의기투합했다.

사회적 기업이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돈이 안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당시, 국가에서는 사회적 기업에게 3년간의 임금을 지원해 주고 있었는데, 유형은 두 가지였다. 임금을 위해 억지로 짜 맞춰진 기업이거나, 3년이 지나면 도산을 기다리는 기업이었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아니, 선택하기 싫었다. 돈을 위해 억지 기업을 만들 수도 없었고, 망할 줄 알면서 사업을 영위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두 가지를 다 이루는 것은 사실상 이상일뿐이었다.

방향도 문제였지만, 사업을 꾸리기는 녹록지 않았다. 둘 다 사업을 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이끌어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과,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은 우리에게서 시간만 빼앗아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시작하지 못했다. 시간만 헛되이 흘러갔고, 우리는 점점 무기력해져 갔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러프하게나마 아이디어 하나가 만들어냈고, 웹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 좋겠다고 합의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벽에 부딪쳤다.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어떻게 만들지 그 방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IT 지식이 없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웹 서비스가 만들어지는지 몰랐다. 오로지 감으로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획서는 당연하게도 어설펐다. 우리는 단지 꿈을 꾸고 있었고, 실현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까웠다(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다. 물론 불가능은 없지만...).



프로그래밍, 내가?


현실 개발자에게 대차게 까이고선,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다. 이게 뭐라고 왜 만들기 어렵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개발자였다면, 충분히 만들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내가!!??

모르면 용감한 법. 무작정 프로그래밍 학원에 등록했다. 뭘 배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몇 달만 지나면 웹 사이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접한 첫날,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나름대로 이해와 배움이 빠르다고 자부해왔지만, 프로그래밍은 이전에 알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학문이었다. 앞에서 뭔가를 가르치는데, 나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 무지의 용기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대학 4년과 실무에서 몇 년을 더 배워도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물며 아무런 지식 없이 몇 개월이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무모함은 정말 지나쳤다.

만약 내가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때처럼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오히려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개발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20대에는 5년을 계획하고 10년을 계획하고 살았다. 1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고 5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했다. 당시에는 무엇이든 생각한 대로 될 거라 여겼고,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이면 성공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알려진 건축가로 활동해야 할 시기다.

지금 와서 돌이켜 그때 계획대로 이뤄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고집스럽게 매진하던 건축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IT기업의 개발자로 살아간다. 계획은 무너졌고, 완전히 틀어졌다. 하지만, 실패는 아니다.


계획은 현재를 전제로 만들어진다.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얼 하고 있을지는 현재 내가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바에 따라서 결정된다. 몇 개월 후에 발생할 일과 변하게 될 환경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고려할 수도 없다. 오로지 현재 처한 상태만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 그대로 실행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처한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선택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환경이 선택을 강요한다. 자신은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계획이 절대 바뀔 리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문제없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 환경이 바뀌면 의지는 생각보다 손쉽게 무너진다. 아이가 생겼다고, 돈이 없다고, 또는 몸이 안 좋아졌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가볍게 계획을 변경해 버린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20대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앞으로의 일을 계획한다. 다만, 예전처럼 확고하지는 않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한 미래를 상상한다. 몇 년 내 개발자의 삶을 끝내려는 계획이 있는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개발자로서의 미래를 설계한다. 앞으로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섣불리 확고한 계획을 세울 수는 없다. 지금 상상하는 미래는 참고이자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특정 계획에 매몰된 나머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박막례 할머니가 이 나이에 무슨 유튜버냐고 손사례를 쳤다면, 지금의 Korea Grandma 박막례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어떤 미래가 다가오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멋진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쩐지, 설레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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