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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Sep 12. 2021

아주 오래된 관계

아무것도 하기 싫은 어느 주말 오후. 어김없이 TV 소리를 배경 삼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 소리가   넘게 울리는  보니 전화가  모양이었다. 소식이나 안부는 카톡으로 주고받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스팸이었다. 그런데 주말에 무슨 스팸이람? 짜증 섞인 손으로 전화를 집어 들고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웬일이지? 무슨 일 있는 건가?’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전화였다. 오랜 시간 서로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전할 소식이 있나 보다 짐작할 따름이었다. 반가움 반 망설임 반으로 버퍼링이 발생한 손가락은 진동이 5번 울릴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가까스로 운동신경의 마비를 풀고 전화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냈어?  이제 결혼해


짐작대로 결혼 소식이었다. 서른이 넘어 걸려온 오랜 친구의 전화는, 대부분 결혼 소식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 축하해”


대학시절에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힘들 때마다 과자 한 봉지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서로 토닥여 주던 그런 관계였다. 그러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연락이 뜸해졌고, 관계는 일시 정지된 채 오랜 기간 멈춰있었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어색함이 음성 어딘가에 배어 있었다.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 했지만, 길고 긴 공백은 둘 사이에 틈을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가야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내향적인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다.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아마 식장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로 가득하겠지. 여기저기 어색함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궁금하지도 않은 말들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다 보니, 친구를 위한 축하보다는 불편한 대면과 어색한 대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자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결혼식에 가기 싫었다. 나는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아프다 할까? 중요한 약속이 생겼다 할까? 코로나 핑계를 댈까?’


온갖 창의적 핑계를 생각해 보았지만, 결혼식 당일까지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피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 것 같았다. 잠깐의 불편함이 친구와의 관계의 무게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래, 잠깐 얼굴만 보고 오자


이렇게 마음먹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빛만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이름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잘 지내냐, 뭐하고 지내냐, 아이는 잘 크냐며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안부를 서로 물어보았다.


걱정은 기우였다. 잠깐 어색한가 싶었지만, 이내  왁자지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 밥 먹는  짧은 시간 동안, 어느덧 우리는 20 초반의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길고 짧았던 두어 시간의 결혼식이 끝나고,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연락하자고, 언제  한잔 하자며 언제가 될지 모를 약속을 하며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래된 관계는 마치  편의 오래된 영화 같다. 자주 찾아보지 않지만, 다시 보면 빠져드는 그런 영화 말이다. 멋들어진 그래픽과 자극적인 소재는 없을지라도, 보는 내내 추억에 빠져 웃음 짓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도 비슷하다. 서로의 삶이 바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하고, 연락조차 하기 쉽지 않다. 서로의 삶을 방해하는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막상 만나, 언제 그랬냐는  예전의 절친한 관계로 돌아간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우울한 기분이 든다면, 오래된 친구를 만나보자.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은 잠시일 뿐이다. 이내 곧, 과거의 어렸을 적의 모습으로 돌아가, 쾌활했던 과거의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아. 모두 건강하자. 그리고 언젠가 웃으며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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