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위로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몇 년 전 일이 마치 몇 달 전에 일어난 것 같다. 코로나 탓도 있겠지만, 한 해를 돌아보아도 딱히 특별한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뉴스에서는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보도가 들려온다. 1월 1일에 떠오르는 해가 뭐 그리 특별한지, 모두들 차를 타고 바다로 산으로 삼삼오오 몰려간다. 무지개 빛으로 떠오르거나 서너 배 이상 큰 해가 떠오른다면, 나도 기꺼이 그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같다. 같은 곳에서 비슷한 밝기로 똑같이 빛날 뿐이다.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때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열은 기억에 없지만, 스물에는 성인이 된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서른엔 미래가 깜깜해 보였다. 그리고 마흔이 된 지금은 변화가 절실하다. 마흔이면 인생의 절반이다. 인생의 전반기를 지나고 후반기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다. 그런데, 괜히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채워지는 숫자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다. 나는 나이를 먹어도 신념이 굳건하리라 믿었는데,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불혹의 의미가 무색하게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린다.
인생을 나이에 비춰보면, 참으로 단순하다. 8살이면 학교에 가고, 20살이면 대학에 간다. 서른 전에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 마흔 쯤이면, 대기업 과장이나 차장 정도 되어야 그나마 면이 선다. 오십이 되면(안 되어 봐서 잘 모르겠지만) 임원을 바라보고, 그게 안 되면 자영업에 뛰어든다. 일부는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계획한다. 참으로 별 것 없다. 정해진 길을 시간에 맞춰 따라가면 만사 오케이이다.
하지만, 인생이 간단할 리 없다. 인생이 이리 단순했다면 불행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서른이 넘어도 취직이 안되고 연애도 못하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려고 몇 년을 허비하고, 공무원이 되려고 청춘을 기꺼이 바친다. 그럼에도 실패한다.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지만, 결국 희망퇴직 대상이 되어 퇴물로 전락한다. 불행은 곁에서 늘 우리를 기다린다. 정해진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길은 점점 좁아진다. 경쟁은 심화되고, 나중엔 서있기 조차 버거워진다.
언제쯤 불행을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긴 한 걸까?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이토록 불행한 이유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는 아닐까? 정해진 길을 따라야만 행복이 찾아온다 믿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삶은 언뜻 보기에 비슷하다. 비슷한 시간에 눈 뜨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역에서 내린다.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고, 비슷한 시간에 퇴근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다를 것 하나 없다. 하지만, 같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더라도, 보는 풍경과 머릿속 상상은 모두 제각각이다. 행복도, 추구하는 삶의 가치도, 모두 각자의 기준으로 정해진다. 삶은 정형화된 어떤 형태로 규정할 수 없다. 마트에서 파는 같은 상표의 공산품 같은 것이 아니다.
시간에 끌려다닐지, 시간을 초월할지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남의 가치와 성취에 휘둘린다면 필연적으로 시간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반대로, 삶의 방향과 가치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시간과 타인에 구애받지 않는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22년이 되었다. 남들 다 하는 목표를 반복해서 부르짖는다. ‘금연하겠다’, ‘운동하겠다’, ‘글 쓰겠다’ 같은 목표를 또다시 남발한다. 그러나 그 끝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 원하는 일이 있다면 나이에 관계없이 추진하는 삶,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 비로소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마흔이라 못하고, 마흔이니까 회사나 다니자는 것이 얼마나 당신을 좀먹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키자. 우리는 나이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무관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흔이 된 걸, 애써 이렇게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