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생활방역 수위가 높아지고 사람들의 활동이 얼어붙은 한 해였다. 얼어붙은 사회분위기처럼 구직 시장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뜩이나 구하기 어렵던 일자리가 더 구하기 어려워졌다. 채용 시장이 줄어들면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30대가 되었으니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쿠팡 야간알바로 하루살이 생활을 하고 있으니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나름대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은 자격요건이 어렵지 않고 지원서류만 내면 시험 없이 면접을 보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기업은 대부분 대기업, 공기업이었고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나오는 문제(NCS, GSAT 등)가 있어서 필기준비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한테는 그런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눈을 낮춰서 문이 열려있는 곳이면 마구잡이로 지원서류를 넣었다. 그렇게 넣어서 들어온 곳이 지금의 병원이다. 처음에는 경력도 부족한 나를 뽑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병원 사람들과의 관계, 효율적이지 않은 업무 형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경력 등은 시간이 갈수록 '이 정도만 하면 되지'하면서 내 능력의 한계를 낮춰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능력을 까먹은 사람이 되었다. 미래에 대한 직업 기대도 '이 병원만 아니면 된다'가 전부였다.
상담사님 : 그렇게 급하게 빨리 서두르면 실제 내 역량과 능력보다 더 낮은 일을 하게 돼요. 당연히 전문성이 높은 일, 페이가 높은 일처럼 그만큼의 능력을 인정받는 일은 시간과 많은 것들이 투자되는 것이 당연해요.
상담사님은 친구들이 추천해 준 직업들의 단계가 대부분 1~2단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지 물어보셨다.
나 : 하면 잘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때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부분에서 생각에 제한이 걸려서 그런 것 아닐까요?
상담사님 : 아니요, 친구들은 그런 제한으로 보는 건 아니에요. OOO님이 욕심이 없어서 그래요. 추천한 직업을 보세요. 인생의 모든 시름을 내려놓은 소박한 농사꾼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저는 여쭤보고 싶어요. OOO님의 친구들이 나를 욕심 없고 소소하게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 결이 같은가요?
그저 내 인생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걸까.
생각해 보니 미래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지금의 직장이 나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당장의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탓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보다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직업이 나와 맞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추천해 준 직업 목록을 보고 처음에는 이렇게 자유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금보다 몇 천배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후에 드는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직업들은 사실 시간이 있으면 바로 할 수도 있는 건데 조금 더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은 해내기 어려울까? 조금 더...'
뚜껑 닫힌 유리병 안에 적응해 버린 벼룩처럼 내 한계를 '조절'해 버렸지만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들어갈 시간과 의지가 나한테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멈칫했지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담사님은 내가 욕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 굉장히 반갑게 들린다고 하시면서 일부러 로스쿨 같이 높은 단계의 진로를 이야기한 것도 내 생각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래야 3~4단계가 상대적으로 쉬워 보여서 도전할 마음이 생기니까. 실제로 로스쿨 제안을 듣고 인사/노무 계열이 '상대적'으로 할 만해 보인건 사실이었다.
상담사님 : OOO님의 능력이 어땠는지 까먹은 거예요. 제가 상담하면서 본 OOO님은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능력이 많다니까요. 실패한 기억 때문에 의미 없는 능력으로 보는 건 아까워요. 욕심을 더 냈으면 좋겠어요.
다음 상담 전에 해야 할 과제가 또 주어졌다.
이 시간부터 나는 '파란색 모자'를 쓰는 것을 상상한다. 이 파란색 모자를 쓴 다음부터는 내 사고방식은 '불가능한 게 없다'라고 바뀐다. 돈이든 시간이든 능력이든 상관없다. 불가능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 도전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써오는 것이 과제였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조금은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모자'라는 형상화된 매개체를 이용해서 이미지화하는 건 집중해서 생각하기에 굉장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10년 가까이 살아온 경험이 있다. 원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감히' 그럴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이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 최근 2~3년 이내였다. 내 틀을 깨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건 상담을 통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배는 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그 키를 잡고 있는 건 나 자신이다. 제약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는 건 신대륙을 향한 마음과 기대를 키우는 것과 같다. 이젠 두근 거리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