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심리상담 일기(15)

by 신푸름

현재 나의 능력과 상황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직업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적고 분류하는 것이 상담 과제로 주어졌다. 과제를 재미있게 하려고 '평행세계의 내가 했으면 하는 직업'을 생각해서 신나게 적으려고 했다. 하지만 몇 개 적지 않았는데 더 이상의 직업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다. 그러고보니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들은 직업이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생 쌀밥만 먹어온 사람한테 자장면과 짬뽕같이 먹어본 적 없는 메뉴를 파는 중국집에 가서 메뉴를 고르라고 하면 무엇이 맛있는지 알 수 없어 선택의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매콤한 지, 짭짤한 지 맛을 알아야 내가 원하는 메뉴를 고를 수 있다. 결국 아는 직업이 많아야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이 무엇인지도 고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의 서칭 끝에 직업의 종류에 대해서 정리해놓은 사이트를 찾았고 그걸 토대로 하고 싶은 일을 추리고 지금 능력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난이도 기준으로 직업을 '상·중·하'로 나눴다. 그 중 '중·하'에 속하는 직업들을 나만의 기준대로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분류했다.

제한없이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나만의 기준으로 분류하기


전에 직업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의 사고회로는 이렇게 흘러갔다.


"나는 사람들하고 대면하는 일을 하면 에너지 소비가 너무 커서 최대한 나서지 않는 일을 하고 싶어"

"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직업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가 잘하는 건 조직 내에서 리드하는 역할보다는 서포트 하주는 역할을 잘해왔어"

"사회에서 어떤 조직의 서포트 역할을 하는 직업은 무엇이 있을까?"

→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은? 사무직, 비서, 행정직....


그런데 선택한 직업들은 전문성을 키우기엔 업무 범위가 너무 넓었다. 상담을 하면서 자존감이 회복되고 나의 가치를 높이는 힘을 기르고 나서는 이 직업은 전문성을 키우기 어려워 내 가치를 올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에 고른 직업들은 전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었던 특징들이 있었다. 전문적인 자격증을 따야 하고, 특정 교육 학과를 나와야 할 수 있는 것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빛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것이 큰 변화였다.


과제를 보신 상담사님은 직업 선택의 가치관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며 반겨하셨고 생각의 틀을 깬 나를 크게 응원해주셨다. 당장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닐 수 있지만 현재 상황만 바라보고 거기서 벗어나는 정도의 좁은 시야로 직업을 선택한 예전 모습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았다.


재능 분류로 넣은 직업들은 취미로 가볍게 생각하고 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어떤 글을 써서 문학계에 등단하겠다 같은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려 한다. 준비한 것도 없었는데 에세이 몇 편 쓰면서 제안받았던 신춘문예 도전 때문에 이런 분야를 무겁게 생각했다.

상담사님은 상시로 열리는 문학, 슬로건, 네이밍 공모전 사이트에 생각나면 들어가서 하나씩 응모해보는 방법을 제안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 부담되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상담사님께서 제시해주셨다. 3년 동안 꾸준히 공모전에 지원해서 100개 중 3개 정도만 입상만 되어도 엄청난 거라는 말씀은 웃기기도 했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경력에 남는 건 도전한 횟수가 아니라 입상한 횟수니까 말이다.


상담사님 : 회사에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심심하면 한 번씩 공모전 아이디어 적어보고 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러다가 나에게 주어지는 기회들이 오거든요. 이거를 진로 상담에서는 '계획된 우연'이라는 말을 써요.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우연으로 오는 것들이 기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 다 갖춰지고 준비가 돼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다 보면 아까 말한 기회들처럼 내 삶이 답해주는 게 있을거예요.


어떤 결정에 매여있는 인생이 아니라, 안되면 언제든지 다른 걸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은 나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저 정해진 코스만 보고 달렸던 경주마 같았던 내가,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했던 내가,

내가 내린 결정을 의심하고 불안해했던 내가,

30여 년 넘게 그렇게 살아온 내가 몇 개월 사이 바뀌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 마음이 든 순간 직감했다. 이제는 상담의 마무리를 할 시간이라고 말이다.



상담사님은 처음에 내가 설문지를 보낸 내용 중 상담을 받고 싶어 했던 이유에 대해서 기억하는지 물어보셨다. 총 3가지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1. 평소 잘 참는 성격인데 감정이 쌓이면 폭발하는 부분을 건강하게 해결하고 싶다.

2. 힘들 때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워나가고 싶다.

3. 진로에 대한 불안감을 해결하고 싶다.


이 상담으로 나는 다음을 이뤘다.

1. 불쑥 나타났던 날카로운 모습들이 과거의 경험에서 내재되어 있던 억울함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2. 나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3. 전보다 나아진 자존감으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상담하면서는 상담의 큰 목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이 바뀌어 가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만 4개월 간 상담의 마무리 단계에서 돌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어느샌가 나는 생각보다 큰 변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말이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자책하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일어나 털어낼 건 털어내고 내가 느낀 변화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대인 관계에서는 어떤 영향이 생겼는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2번의 시간을 통해 상담을 마무리하기로 정했다.


학생 때 부모님에게 보호받는 생활을 하다가 대학교 졸업하고 맹수들이 가득한 밀림 같은 사회에 던져진 사회초년생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젠 겁보다는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 길이 막혀있을지라도 방법은 많다. 뚫고 가도 되고 돌아가도 된다. 나에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전 14화[심리상담] 뚜껑 닫힌 유리병 속 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