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돼서 병원 운영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 병원장님이 바뀌면서 병원 대표자 변경으로 인해 사업자등록증 같이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서류에서 수정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관련 기관과 거래업체에 연락하여 수정 신고를 일일이 해야 했다.
병원장 이·취임식 준비도 굉장한 일이었다. 이번 년도 초에 병원 임원들이 다수 퇴직하면서 현재 남은 임원들이 큰 행사를 처음 준비하는 입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행사에 대한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사진으로 남아있는 현장의 모습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지난 행사 식순 팜플렛이 있었지만 모든 걸 새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행사에 참여해서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임원분들이 '저번에 이렇게 했던 것 같아'라는 말에 의지해서 하나씩 준비해 나가야 했기에 더욱 답답했다. 과장님께서 자료를 뒤져보다가 2018년에 있었던 병원 OO주년 기념식 행사 식순 팜플릿을 찾아내서 귀중한 고대 유물을 발견한 것 마냥 좋아하시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보기엔 병원 이미지게 걸맞지 않게 조잡하게 만든 것이 보여서 심기가 불편했다. 이왕 치르는 행사면 내가 맡은 부분은 제대로 준비하고 자료를 남겨놔야겠다 싶어서 식순 팜플렛, 플랜카드, 기념 수건, 초청장, 공로패 등 디자인과 문구를 다른 병원 행사 자료를 참고하면서 초안과 시안을 저장했다. 그렇게 준비하여 진행한 행사는 자체적인 평가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뿌듯했다.
12월에는 결혼 준비 일정으로 정신이 없었다. 여자친구와 각자의 부모님을 한 번씩 더 찾아뵙고 결혼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보여드리면서 상견례 일정을 잡았다. 상견례 장소를 잡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상견례 추천 장소'를 검색해서 찾았는데 후보지를 고르면서 여러 요인들을 고려해서 제외하다 보니 원하는 장소의 기준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주차가 잘되는가?
상견례가 진행되는 12월 날씨를 고려했을 때 춥지 않게 최대한 동선이 짧은지?
식사가 각자 먹기 편한 방식인가? (개별 코스)
식사가 부모님들 입맛에 맞는지? (못 먹는 음식 고려)
가격 대비 음식과 서비스제공이 괜찮은지?
가족끼리 모일 수 있도록 공간이 분리된 방이 제공되는지?
정말 여러 후보지 중에서 고민해서 선택해서 예약했다가 다른 식당 정보를 보고 더 좋은 것 같아 취소하고 예약하기를 3차례 정도 반복했던 것 같다. 그제야 우리가 원하는 기준을 대부분 충족하는 좋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이야기하지만 상견례했던 날에 하필이면 탄핵 가결안 통과 여부를 두고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탄핵 찬성·반대 시위가 크게 열렸었다. 그런데 최종으로 정한 상견례 식당 장소 이전 골랐던 장소들이 여의도와 광화문이었다. 결혼 준비 카페 게시글에 많이 올라오는 상견례 후기에 대부분의 장소가 여의도, 광화문이어서 우리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찾아보고 선택을 했었다. 만약 여기로 확정했다면 부모님들이 오시기에 이동이 편하지 않고 이나 주변 분위기가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봉우리 을지로점 아무튼 상견례 장소도 걱정이었지만 상견례 분위기도 신경이 많이 쓰인 부분이었다. 상견례 전 여자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서로 접점이 많이 없는 것이 상견례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했었다. 여자친구 부모님은 믿음이 굳건한 기독교 생활을 해오셨고 우리 집은 그와는 무관했다. 전혀 다르게 살아온 분들의 만남이라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없던 부분은 상견례 당일 2가지 발생했다. (이건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먼저, 집에서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입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생각보다 괜찮게 흘러갔다. 이것만으로도 큰 걱정이 사라져서 감사했는데 의외의 부분에서 남은 걱정이 날아갔다. 전혀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친동생과 처남, 처남댁이 일하는 분야가 비슷해서 말이 잘 통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와 여자친구가 각 테이블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치보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괜한 걱정을 했나 싶을 정도로 상견례는 화기애애하게 끝났고 결혼 준비의 큰 산을 별일 없이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벌써 연말이 되었다. 내년이 되면 병원에서 역할이 커지고 결혼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돼서 걱정할 일이 많아지겠지만 이번에 겪었던 일들처럼 내 걱정보다 주어진 일들을 잘 헤쳐나가고 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위해서 좋은 생각 방식인 것 같다. 계획대로 안돼도 아버지의 입담 같은 재치 있는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2025년은 더 발전하고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크다. 상복이 터졌던 2024년,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고 하던 일들을 꾸준히 하는 것. 그것이 있어야 앞선 기대의 근거가 튼튼히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