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스물번째글 #수원으로의 여행
'계획이나 해야 되는 압박감 없이 그냥 순간순간에 집중하면서 원초적으로 여행해봐요'
놀랍게도 나에게 10일 정도의 휴가가 남아있었다. 10월 직장 계약 만료 전까지는 다 써야 하는 상황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내 머리는 벌써 어떻게 휴가를 나누어 쓸까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휴일 뒤에 또 휴가를 붙여서 쓰는 것이 눈치가 보여서 못썼지만 이번에는 추석 직후 이틀을 휴가를 내기로 했다.
추석의 마지막 휴일 저녁, 다음날부터 있을 이틀의 휴가 동안 무엇을 할지 그때까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을 가보려고 하니 제일 먼저는 어디를 가야 할지 못 고르겠고, 비용 생각하자니 가까운 데로 가야 하는데 거기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계획을 세우려니 머리가 복잡해져서 포기하게 되었다. 자기 직전까지 고민하던 중 여자 친구와 잠깐 연락을 했다. 나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고 있는 여자 친구는 미션을 주겠다면서 내일 당장 계획 없이 어디든 다녀오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머릿속에서 빙빙 돌기만 하던 생각들이 '미션'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계획 없는 여행이라니, 나에게 어려운 미션이긴 했다.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이런 건 기본적으로 계획을 세워놔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미션의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이번엔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나는 지역을 가보기로 했다.
여자 친구와 이야기 나누다가 나온 지역 중 수원 화성이 마음에 남는 것 같아 수원으로 일단 정하고 제일 빠른 출발시간 버스표를 무작정 예매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검색하거나 찾지 않았다. 수원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 자체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수원 화성을 가려면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만 알아봤다. 혼자서 떠나는 즉흥여행은 처음이라 얼떨떨하면서도 즉흥적으로 버스표를 끊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흥분한 걸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계획대로만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미션을 받고 10분 안에 정해진 곳, 수원.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쿨하게 잠을 청하려 했지만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전 7시 10분 출발하는 버스에 탑승하고 수원에 대해 더 찾고 싶어서 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 어떤 느낌인지 한번 제대로 느껴봄과 동시에 틀 안에 정해져 있는 내 모습을 깨보고 싶었다. 평일 오전이라 막힘없이 수원에 도착을 했고 수원 화성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화서문 근처에 내렸다.
화서문을 통해 성벽을 따라 걸어갔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길이 나 있는 대로 걸어갔더니 장안문에서 끝이 나있었다. 수원 화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가서 수원 화성을 네이버에 치고 지도를 검색하려다가 바로 밑에 수원 화성에서 스탬프 투어가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 제목만 보고 '이거다!'하고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스탬프를 찍어가면서 돌아다니면 명소 관광도 하고 10곳의 스탬프를 다 찍으면 기념품도 준다니 수집욕도 발동이 되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북을 준다고 해서 안내소를 찾다가 화성행궁 근처 안내소까지 내려와서 스탬프북을 받을 수 있었다. 수원 화성에 있는 큰 문들 중심으로 관광안내소가 많았는데 나는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곳을 찾다가 고생을 했다. 화성 행궁을 시작으로 수원에서 정한 수원 화성 명소 10곳을 두 발로 바쁘게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번 글은 사실 수원 화성 여행에 대한 글이 아니다. 당일 치기 여행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신기하게 알게 된 걸 정리해보고자 쓰는 글이다. MBTI 검사가 한창 유행일 때 나의 MBTI는 ISFJ였다. 내성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라는 말이 딱 맞는 유형. 전에는 여행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내가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지,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었다. 하도 실내에 있다 보니 내가 이런 걸 좋아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2020년 6월 걷기 운동을 시작하고 새벽, 저녁 계속 밖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가 제법 밖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무조건 밖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덥지 않은 선선한 날씨' 속에서 '계획을 가지고 알차게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좋아할까 고민한 지 시간은 꽤 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코로나 전의 나의 일상은 반복됨과 정해짐의 연속이었다. 나의 의지가 반영이 거의 되지 않는 일상에서 나에 대해서 잘 알기는 쉽지 않았다. 코로나 후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정비할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해? 가장 힘이나? 무엇을 하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곤란했다. '글쎄, 나는 집에 계속 있다 보니까 집에서 드라마 보거나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거 같은데? 밖에서 돌아다니는 건 에너지 쏟는 것 같아서 피곤할 것 같은데...'까지가 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전부였다. 만약 내가 계속 그때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지금까지도 애매모호한 답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생활 습관뿐만 아니라 경험하는 것도 많아졌다. 여자 친구 덕분에 어딘가 많이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보는 것이 많아지고 생각도 많아졌다. 얘기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채우고 싶어지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목표를 정해 보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에 비할바는 안되지만 내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간다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게 많아지는 것이 신기했다.
이번엔 혼자 수원에 와서 걸어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매번 이렇게 힘든 여행을 할까? 그냥 시원한 카페나 경치 좋은 장소에서 눈에 보이는 걸 즐기면서 여유를 느끼고 몸 편하게 있다가 가면 되는데 왜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할까? ISFJ의 J성향 때문에 계획대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 때문인가?' 많은 생각이 스쳐갔는데 스탬프 10개를 다 찍고 기념품을 받으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수집욕도 많고 성취 감을 느끼면서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한 것들을 기록에 남겨서 나중에 그 기록들을 볼 때 당시 느꼈던 감정, 사건, 생각을 최대한 온전히 느끼고 싶은 욕구도 크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을 가면 사진을 많이 찍어서 남기고 일기도 열심히 쓴다. 여행 중도 바쁘지만 여행 직후도 바쁘다. 사진 정리도 해야 하고 여행 중간 들었던 생각을 짧게 남긴 메모를 토대로 글도 써야 한다. 이런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져야 그 여행을 충분히 즐겼다고 인정하게 된다. 사진과 일기, 글들이 여행의 흔적이자 수집된 기념품이다. 몸이 힘들지 않으면 어딘가에 오래 있어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것인데 그걸 못 견뎌한다. 그 시간에 새롭게 경험할 것을 더 채울 수도 있으니 아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수원에서도 화성 근처 전망 좋은 카페나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와도 상관없었다. 굳이 땀을 흘러가면서 성벽을 오르내리고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돌아가거나 코스를 잘못 짜서 동선을 낭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내가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여행할 때 찾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힘든 게 나쁜 건 아니니까. '너는 왜 힘든 여행을 하려고 해?' 나에 대해서 따지듯이 의문을 가지기보다 '너가 힘든 여행을 하는 이유가 이런 거구나' 이해하니까 내 취향이 왜 이 모양인가하는 문제는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남들이 보는 시선은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를 즐기면 되지 뭐. 한 번만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의심 없이 빠져서 해보길 바랐는데 이번에 조금이나마 그렇게 해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욕구를 다 채운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것에 기준을 맞추려고 하지 말자. 그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