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뚜벅이 여행의 시작 (1)
#단양 #여행 #혼자여행
The world is a book and those who do not travel and read only one page.
세상은 책과 같고 여행을 하지 않는 자는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과 다름없다.
- 아우구스티누스
저번 수원 당일치기 여행을 해보고 혼자서 하는 여행의 맛을 조금 알게 되었다. 원주에서 30여 년 가까이 살면서 짧지만 내 의지로 여행을 가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여행을 간다 하면 내 성격상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준비해야 할 것, 어디로 갈 것인지, 그곳으로는 어떻게 이동하고, 계획이 틀어지면 어떤 대책을 세우고, 같이 가는 상대가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등 많은 것을 고려하다 보니 여행을 가기 전부터가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결국 여행은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이 들고 쉽게 하지 못하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한 번 해보고 나니 내가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운 경험은 머릿속을 신선한 공기로 환기시킨다. 굳어있던 관념을 솟아나는 열정으로 사르르 녹이고 렉이 걸린 듯 버벅거리고 있던 삶을 재부팅시켜 원활히 돌아가게 만든다.
마침 나에게는 또다시 며칠간의 휴가기간이 주어졌고 망설이지 않고 '단양'을 가보기로 했다. 단양에 대해 많은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다. 그냥 단양에서 하고 있는 '단양 여권' 이벤트를 해보고 싶었다. 여행에 굳이 '왜?'라는 거창한 이유를 댈 필요 없다. 때론 이런 단순한 이유가 무료한 삶에 멋진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원주역이 이전하고 나서 한 번도 기차를 이용해 보지 않았다. 접근성이 어려운 곳으로 옮겨진 것도 이용하지 않은 하나의 이유였고 굳이 기차를 타고 갈 상황도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 가게 된 단양은 버스보다 기차가 훨씬 배차도 많고 이동이 편해서 기차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레일을 달리는 기차 창 밖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어떤 일정을 보낼까, 무슨 일들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하다 보니 40여분이 지났고 어느새 단양에 도착했다.
단양역 아침 일찍 도착해서 아직 안개가 자욱한 단양역을 나오니 바로 앞에 국도 하나가 지나고 있었고 그 외 보이는 것은 산 밖에 없었다. 단양역에서 단양 시내 입구로 가려면 걸어서 20-30분 정도 가야 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차도를 달리는 차들이 많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시내 입구에서 30분 정도 더 걸어가면 시내 중심지가 나온다. 남한강 강가 쪽으로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중심지를 향해 걸으면서 도시 맞은편에 사람이 사는 곳과 어울려있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여기서 어디든지 발 닿는 곳이라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모험하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시내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가게가 오전 10시 이후에 여는데 9시 조금 넘어 도착하니 할 게 없었다. 전혀 당황할 일이 아니었다. 예전보다 조금은 유연해진 머리로 다음날 가려고 했던 고수동굴을 하루 당겨서 가보기로 했다.
고수동굴
고수동굴 입구 매표소
고수동굴의 단면도. 미공개된 구간이 굉장히 많다. 고수동굴에 들어가기 전 매표소 건물 안에 동굴에 대한 교육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구간을 둘러봐야 했다. 아직 미공개된 구간이 굉장히 길고 깊다는 것이 신기했다. 미공개된 구간이 공개되려면 그 구간에 고여있는 물들을 빼내야 갈 수 있다고 한다. 동굴에 들어가서는 신비롭고 거대한 자연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종유석이 날카로운 동물의 이빨 같기도 하고 동굴 안에 또 다른 작은 동굴의 세계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둥글둥글하게 깎여나간 부분도 있고 마구잡이로 깨져서 모가 난 부분도 있었다.
바깥과는 다른 세계의 매력에 빠져드는 건 좋은 경험이지만 천장에서 간혹 떨어지는 물방울에 동굴 바닥의 철제 길이 젖은 탓에 발이 미끌거려 넘어지는 경험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매표소에서 미리 장갑을 주셨는데 경사가 급한 계단 구간도 있고 난간을 꼭 잡고 가야 하는 구간도 많아서 장갑은 꼭 필요했다. 관람 후기에 동굴을 다 돌고 나오면 땀에 흠뻑 젖어 나오니 조심하라는 글을 봤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동굴 초반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땀이 나지 않아 가볍게 돌겠다고 쉽게 봤는데 생각보다 코스가 길었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온 몸에 긴장을 두르고 가니 출구에 나오는 내 등도 흠뻑 젖어 있었다.
어릴 때 봤던 동굴은 어둡고 습한 기분 나쁜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달의 뒷면처럼 존재는 알고 있지만 평소 볼 수 없어서 신비함으로 남아 있는 공간을 본 것 같아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약간의 고생이 짜릿함을 가져다주었다.
꼬마뚱김밥과 단양 여권
고수동굴에서 나와서 시내 쪽으로 걸어가며 단양의 유명한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보다 도시 가까이 오는구나, 저 위에는 햇빛은 안 뜨겁나 여러 생각을 했다. 혼자 있으니까 하나를 보더라도 더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시내에 도착해서 단양에 왔던 이유인 단양 여권을 사기 위해 단양 여권 판매처인 꼬마뚱김밥 가게에 갔다. 첫 끼니인 참치뚱김밥을 시킨 뒤에 쉬지 않고 걸었던 다리에 잠시 휴식을 주기로 했다. 김밥에 곁들인 가락국수 국물로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단양여권도 받아서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단양 여권은 단양시에서 제작한 스탬프 북의 새로운 형태인데 여권같이 생긴 케이스 안에 입장권 같은 스탬프 카드가 40여 개 넘게 들어있다. 여권은 구경당(카페, 디저트), 꼬마뚱김밥(김밥, 탕수육), 단양노트(문구, 기념품) 3곳에서 판매하고 있다.(원래는 4곳인데 한 곳이 폐점했다고 했다.) 단양시에 지정한 명소, 음식점, 숙소 등 단양 로컬 명소 44곳과 단양군 관광협의회 회원사 100여 곳에서 소비활동을 하게 되면 해당 장소의 스탬프 카드에 인증 도장을 찍어준다. 스탬프 카드를 모으다 보면 정해진 개수에 따라 기념품이 지급된다. 다른 지역과 달랐던 것은 기념품을 누적해서 준다는 것이다. 기념품을 주는 스탬프 개수는 1, 3, 6, 10, 15, 20, 25개이며 만약에 스탬프 6개를 찍었다고 한다면 스탬프가 1개, 3개, 6개일 때 주는 기념품을 다 준다. 내가 찍은 스탬프 개수만큼 나중에 기념품 지급처에 방문하면 모두 받을 수 있다. 기념품을 받고 나면 중복지급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념품 지급받기 위해 인증한 스탬프 카드에 펀치 구멍을 뚫어준다. 놓치면 안 되는 꿀팁은 스탬프 카드를 보면 인증 장소의 베네핏이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결제할 때 스탬프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먼저 보고 결제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하면 좋다. 실제로 나는 메뉴를 결제하고 나서야 그곳이 스탬프를 받을 수 있는 곳인 걸 알았다. 확인해보니 전 메뉴 10% 할인 베네핏이 있어서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친절하게 결제를 취소해주시고 재결제 해주셨다.
블랙핑크 아이스크림. 딸기와 초코의 조합이 처음으로 괜찮다고 느껴진 메뉴.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서 당 충전을 하고 나니 오후 2시쯤 되었다. 4시에 숙소 체크인이라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시간 맞춰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숙소 사장님으로부터 개인 사정이 생겨서 오후 7시에 입실을 해달라는 문자가 온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쉬지 못한다는 생각과 숙소비용을 냈는데도 3시간의 서비스 비용을 날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숙소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고 쉴 것 같은데 이왕 단양에 온 김에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자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을 투자해서 가볼 만한 곳이 어디일까 보다가 만천하 스카이워크에 가기로 결정했다.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높은 데서 단양 시내를 꼭 보고 싶었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단양강 잔도길 단양 시내 입구를 나가는 길에 높진 않지만 가파른 절벽을 따라 단양강 잔도길이 있다. 데크길이 설치되어 사이사이 뚫려있는 바닥 틈으로 강이 보이는데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느낌이 싫어서 잔도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잔도길을 지나고 나온 매표소에서 전망대 입장권을 사서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탑승인원이 어느 정도 차니 버스가 출발했다. 매표소 출발 직후 바라본 전망대는 산 꼭대기 같은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가는데 오래 걸리겠다 생각했는데 구불거리는 산 길을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빙글빙글 올라가는 길을 따라 제일 위층에 도착하니 남한강에 폭 안겨 있는 아기자기한 단양 시내가 보였다. 주변에 강과 산이 둘러싼 모습을 보니 키 큰 건물들에 잔뜩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자연과 잘 어우러진 모습을 사진에 잘 담고 싶어서 여러 방면에서 찍고 싶었는데 전망대 맨 위쪽은 유리 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긴장이 잔뜩 되어 힘들었다. 절로 '으.....' 하는 곡소리가 나왔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만천하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보이는 단양시내 전경
다누리 아쿠아리움
다음 목적지는 다누리 아쿠아리움이었다. 민물에 서식하는 어류들을 중심으로 수족관이 전시가 되어 있어서 다른 수족관에서 보기 힘든 어류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족관 특유의 푸르스름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해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방문해서 그런지 방문한 시간대가 조용하진 않았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영역이지만 기회가 생겨서 보게 되니 물고기들의 이모저모 생김새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물결치는 지느러미와 뻐끔거리는 입모양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른 물고기에 눈을 돌리고 자연환경과 비슷하게 꾸며놓은 수족관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다가 다시 관찰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끝이 나있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볼거리가 풍족했던 곳이었다.
관람을 다하고 나와서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망치 돈까스'에서 저녁을 먹고 '단양노트'에서 기념품 몇 가지와 독립 출판된 서적 한 권을 샀다. <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좋아>라는 다섯지혜 작가님의 에세이 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준비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샀는데 숙소 입실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잠깐 들린 카페에 앉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와 비슷한 느낌의 커플 이야기였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결혼 준비로 싸우고 다투다가 파혼까지 간다는 글을 많이 봤는데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는 것을 지켜보는 요즘, 서로의 다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배려해줄 수 있는지가 원활한 결혼 준비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되었다. 책을 덮고 나서 눈치라도 챈 듯이 곧바로 숙소에서 문자가 왔다. 저녁 6시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입실해도 된다는 문자였다. 하루를 꽉 차게 돌아다니느라 수고한 내 두 다리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따뜻한 물로 씻으며 노곤함을 달랬다. 로비에 잠깐 나와서 열기를 식히고 있었는데 체크인을 미뤄서 죄송하다면서 사장님께서 시원한 커피 한잔을 내주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시원함을 감사하게 느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찍었던 사진도 다시 돌아보고 일기도 써 내려갔다.
휴식 그리고 생각
이번 여행을 해보면서 느낀 건 생각보다 세밀한 계획을 짜지 않아도 가보고 싶은 곳을 지도에 표시해놓고 입장 가능 시간, 마감 시간 정도만 파악해서 일정이 너무 붕 뜨는 상황만 줄이는 것만으로도 내 기준으로는 만족스러운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머리 아프게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느라 여행이 오히려 일이 돼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치밀하게 계획을 짜는 내 모습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도 필요했다. 여행을 할수록 계획에 맞추느라 마음 고생하기보다 계획대로 안되더라도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여행이 사람의 성향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둥글둥글하게 성장시켜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