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 속에서 '억울함'의 답을 찾아보다.
어머니들의 자식 자랑은 모임에서의 가장 핫한 주제가 된다. 우리 아들·딸이 어디 나가서 상 받았고, 전교에서 이번에 몇 등 했고, 의대·교대·법대 등 좋은 대학 입학했고 등등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니 다들 남의 자식들을 직접 보지 않아도 신상은 훤히 꿰고 계셨다. 분명 처음 보는 분인데 이미 나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계신 어머님들이 많았다. 다들 내가 민사고를 목표로 하는 OOO, 의대를 목표로 하는 OOO로 알고 계셨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타인들도 나에게 그런 큰 기대를 가지는 것이 눈치가 보이고 큰 짐처럼 무겁게 느껴져서 싫었다.
전년도 수능이 쉬었기 때문에 이번 수능도 쉬울 거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굉장히 어렵게 나왔다.
나는 결국 의대를 가지 못했다. 고3 말미에 본 수능을 완전 망쳤다. 수능 끝나고 집에 왔는데 나의 상태를 보고 결과를 짐작하셨는지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베란다에서 애꿎은 빨래를 두드리셨다.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서 어머니께서는 내가 의대를 못 갈 정도의 수능 성적을 받은 것에 대해서 '동네 창피하다'라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우리 아들은 의대 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어머니에게 인-서울 하기에도 부족한 나의 수능 점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으신 느낌일 것 같았다. 20년 가까이 자식의 목표를 위해 학습지, 교재, 학원 등 할 수있는 모든 지원을 해줬는데 받으신 결과가 참담한 수능 성적이라니. 나는 부모님께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것이 내 탓 같아서 지금도 부모님을 뵈면 한편에 죄송함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상담사님께 이런 과거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상담사님 : 그때 부모님에게 굉장히 죄송하다고 했는데 그건 부모님을 향한 마음이거든요. 본인 자신은 어땠어요? 기분이 어떠셨을까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으니 맥 없이 있었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속에서는 많은 감정들이 들끓었다. 학창 시절 세운 목표들은 내가 스스로 정한 목표가 거의 없었다. 굳이 그 목표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다 알리시고 자랑하셨어야 했을까 답답했고 부모님께서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게 억울했다. 얘기하다 보니 여기서 '억울함'이라는 감정이 또 나옴을 알고 신기했다.
상담사님 : 억울함보다 죄송하다는 마음을 먼저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마음을 떠올리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사람들의 관계에도 이어지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돼, 저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돼, 실망시키면 안 돼... 그런데 그런 마음 안에 억울함이 있는 거죠. OOO님의 삶의 중요한 핵심감정은 '억울함' 같아요. OOO님이 열심히 한 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네요...
어릴 적의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경험한 세상은 결괏값이 나오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결괏값은 나에게 정말 중요하다. 이게 최근 이직을 준비하면서 자신감에 문제가 생기는 것과 이어졌다. 자소서나 면접에서 자신을 뽑을 수 있도록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내가 이룬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해온 것들이 남들에 비해 특출나지 않고 별 것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무엇을 써야 할지 어려워지는 것이다.
2. 전지적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보듬어주다.
나 : 억울하다는 것도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부분인데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제가 경험하는 일들에 이런 감정이 다 깔려 있으면 빨리 풀어내야 할 것 같은데요.
상담사님 : 억울함은 푸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이 그랬구나, 내 마음이 굉장히 억울했구나' 알아주는 거예요. 지금 경험하신 상황에서 억울함을 안 느끼는 게 더 비정상인 거예요. 최선을 다했는데 그 최선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죠...
어머니께 들은 말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지 않으려면 나는 실패를 하면 안 됐다. 실패라는 것이 단순이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잘못한 행동까지 포함되어서 상대방이 나를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항상 그런 상황이 시나리오처럼 그려진다. 나의 세계는 그러했다. 상담사님은 이제 현실 세계로 와야 한다고 하셨다. 현실 세계에서는 나의 각본대로 내가 실수한다고 욕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라고 하면 내 마음속에 나와 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표면적인 대인관계와 나의 가치관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내면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략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사님의 '나의 세계'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던 것 같다. 과거의 내가 겪은 모든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과거 나의 실패를 바라본 어머니가 현재 내 미숙한 주차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 되었고 과거의 어머니가 보여준 부정적인 반응이 현재 이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그리게 했다. 부모님과 겪은 경험이 대상만 달라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워져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이제는 나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서 전지적 시점으로 내 삶을 바라봐야 했다. 그래 OOO아, 너 정말 억울했겠구나. 상담사님은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상담이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상담사님은 나의 기분을 물어보셨다.
나 : 마음이 엄청 편해졌어요. 그리고... 저번 시간이랑 이어지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을 너무 늦게 알아서 제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요. 조금 더 일찍 알아줄걸 하는 마음이에요.
상담사님 : 저는 OOO님이 상담할 때마다 나한테 미안하다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엄청 뭉클해요. OOO님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고 죄송하고...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상담하면서 정말 미안해야 하는 대상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반갑고 기특하기도 하고 뭉클해요. 자기 자신을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이젠 나 자신을 보듬어주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인색하고 엄격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상담사님은 내가 했던 말들이 굉장히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상담한 지 몇 번 되지 않았는데 나를 아끼는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어색함이 컸지만 솔직한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속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내려고 한 게 좋은 결과를 내는 것 같았다.
상담사님은 다음과 같은 예시와 함께 상담 내용을 정리해주셨다. 여자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가 나중에 '아까는 내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빨리빨리 하라고 소리 지른 것 같다'라고 이야기해 주면 여자친구 행동이 이해가 되니까 마음이 조금 너그럽게 풀리는 것처럼 내 감정도 그렇게 이해해 주고 수용하고 받아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음 시간까지 내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해하고 '그래 지금 나는 이런 감정이구나' 인정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만약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압박을 받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상담을 받고 나서는 어렵겠지만 그 상황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 자신이 변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긍정적인 삶의 변화가 있으니 상담사님이 초반에 말씀하셨듯이 상담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좋은 일들이 따라오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을 경험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이미 좋은 일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