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석 Jun 08. 2019

그때는 그랬다

  여름날 이른 아침, 들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 손에는 이슬을 머금은 산딸기가 가득 담긴 놋쇠 술잔이 들려 있곤 했다. 탐스런 산딸기를 담은 술잔을 아버지가 우리에게 건네줄 때면 왜 이 맛있는 딸기를 아버지는 잡숫지 않고 우리에게 주는 걸까, 아버지는 딸기를 싫어하는 걸까 생각했다.  

                

  감이 어느 정도 굵게 되면 새벽잠을 설친다. 떨어진 감을 밀 가마니에 넣고 2,3일만 기다리면 달콤한 연시가 된다. 이 달고 맛있는 감이 아버지에게는 그저 배탈 나게 만드는 물건에 불과했다. 밀 가마니 속의 감을 아버지한테 들키면 바로 퇴비 구덩이로 들어갔다. 먹을 수 없게 된 감은 잃어버린 보물만큼이나 아까웠다. 맛있는 감을 버리는 아버지가 더없이 미웠다.             

   

  국민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동네에는 시계 가진 집이 한 집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당시 어머니들은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아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불가사의다.   

   

   학급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칼로 깎지 않아도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볼펜이란 걸 사고 만화책을 샀다. 얼마간이 지나고 나서 '지난번에 학급비를 얼마 냈느냐'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4원을 냈다고 오금을 저리며 했다. 돈은 얼마를 달라고 했느냐고 또 물으셨다. 10원을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남은 돈은 어쨌느냐고 아버지는 또 물으셨다. 장에 가서 볼펜이란 거 고 만화책을 샀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을 않으시더니 “나는 안다. 아부지는 다 안다.” 그 말씀뿐이었다. 이후로는 아버지께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거짓말을 못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는.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완두콩이 지천으로 널린 밭은 최상의 만찬장이었다. 완두콩 넝쿨 속에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눈앞에 잔뜩 달린 완두콩을 따먹기만 하면 되었다. 할머니가 가끔 내다봐도 동무들이 지나가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누가 따먹었는지 표시도 나지 않았다. 콩 껍질이 말랑말랑한 막 익어가는 달고 맛있는 완두콩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꼴을 베러 가든지 소를 고 산으로 가 풀을 먹여야 했다. 소를 끌고 산으로 가면 소야 풀을 먹든 말든 그저 놀기에만 바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산 여기저기 흩어진 소를 찾아 집에 몰고 오기만 하면 되었다. 간혹 소를 찾지 못해 울면서 집에 가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횃불을 켜들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단 한 번도 소를 못 찾은 기억은 없다.     



   여름방학이 끝나 갈 때면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방학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울고불고 를 써도 통하지 않았다. 무서운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어쩔 수 없이 소를 끌고 산으로 가야만 했다.  

 방학책을 좀 푼 거 말고는 숙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학교에 가야 했다. 고맙게도 대부분 선생님들은 숙제 검사를 하는 척만 했다. 어떤 선생님은 그것마저 생략했다. 그런 선생님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선생님이 반짝이는 양철 필통과 책받침을 나눠 주었다. 연필과 칼, 지우개도 주었다. 처음 보는 양철 필통과 책받침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필통 속의 연필이 딸각거리는 소리까지도 좋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만져 보고 여닫아보고 흔들어보면서 혼자 종일을 가지고 놀았다. 흠집이라도 날 새라 보물 단지 만지듯 조심하고 조심하며 가지고 놀았다.     


  겨울철 학교 가는 길은 울고 싶을 정도로 추웠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논두렁 밑으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뛰어도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도 춥기는 매 한 가지였다. 겨우내 학교에서 불이라곤 쬘 수가 없었다. 땔 나무가 없어 난로는 그저 전시물에 불과했다. 그래도 난로 가 자리 옆에 앉은 아이들은 따스한 온기가 있는 듯해서 부럽기까지 했다.     


  선생님들이 가정방문 오시면 누구네 집에서나 막걸리를 내 왔다. 거나하게 취한 선생님은 저녁 무렵 기분 좋게 비틀거리며 학교로 돌아가셨다. 아무도 그러한 선생님을 흉보지 않았다. 손가락질하지도 않았다.   

 아이들 엄마들은 하나같이 ‘우리 아이 많이 때려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하곤 했다. 아이 때려 달라는 것은 가정방문 오신 선생님께 하는 일종의 인사였던 모양이다. 실제 엄마들은 많이 때려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때는 그랬다.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 살 돈이 없어 이웃집으로 꾸러 다니는 일은 다반사였다. 미리 돈을 가져가야 한다고 왜 말하지 않았냐고 역정을 내면서도 어머니는 이웃집으로 돈을 꾸러 가고는 했다. 도화지 한 장 살 돈이 없어도 그걸 부끄러워하거나 크게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이른 봄 미나리를 수확하는 집에서는 집집이 다니며 미나리를 한 아름씩 나눠 주곤 했다. 미나리꽝이 없어도 봄철에는 미나리를 맘껏 먹을 수 있었다. 배추나 상추 철에는 집에 사람이 없어도 들에 갔다 오면서 누군가가 한, 두 단 채소 단을 던져 놓고 가곤 했다. 누가 던져놓고 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다 나누어 먹으며 살았다. 남은 채소를 장에 내다 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남는 것은 소를 주면 되었다.     

  

  할머니는 동네 제삿날을 다 기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누구네 제사다. 그 양반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돌아가셨고... 어린 맘에도 글도 모르는 할머니가 동네 제삿날을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참 신기했다.   

 그런 밤엔 어김없이 제삿밥을 먹을 수 있었다. 새벽 2,3시경 제삿밥 먹으라며 할머니가 깨우면 부스스 일어나 제삿밥을 먹고 또 잠에 빠지곤 했다. 자다가 먹는 제삿밥인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만 놀았다. 집안은 좁기도 했지만 극성스러운 장난에 할머니에게 빗자루로 엉덩짝 맞기가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논이나 저수지에 얼음이 얼면 온종일 썰매 타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썰매 타기가 지겨워지면 연을 날리면 되었다. 철마다 놀 놀이가 어찌 그렇게 많았을까! 심심하기는 고사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여름날은 한 끼도 빼지 않고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만 먹었다. 저녁은 매 끼마다 칼국수였다. 칼국수에 곁들여 먹는 열무에 고추장, 된장 넣고 어머니가 손으로 버무려 주는 보리밥은 더할 수 없는 맛이었다. 늦은 오후 소 먹이러 가기 전 우물에서 갓 길은 찬물에 말아 고추장과 함께 먹는 보리밥 또한 언제 먹어도 달기만 했다.     

    
  모두가 꽁보리밥을 먹었지만 할머니 밥은 늘 하얀 쌀밥이었다. 그 하얀 쌀밥을 할머니는 꼭 반쯤 남겨 내게 주었다. 누나나 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없이 남겨 준 쌀밥을 혼자서 다 먹었다. 할머니가 남겨준 쌀밥을 먹기 위해서는 내 밥그릇 보리밥은 천천히 천천히 먹어야 했다.


  그토록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을 하거나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불편한 줄도 몰랐고 부러워할 일도 없었다. 학교 가까이 이사를 갔으면 바라기는 했다. 나이 들지 말고 계속 이대로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나름대로는 행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다 가시고 내가 그분들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