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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Aug 02. 2019

춥고 배고팠던 백골 교육대

  얼마를 달렸을까 더플백에 앉아 졸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다란 뼈다귀가 X자로 겹쳐진 위에 해골을 얹은 엄청나게 큰 해적 마크가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될 백골 교육대 입구였다. 교육대는 주변에 민가 하나 없었고 산 위로 하늘만 빼꼼히 보일 뿐이었다.

   교육대에서 4주간의 교육을 함께 받을 동기생은 1백3,40 명 가량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곳에서도 한동안 교육을 하지 않았다. 힘든 교육을 받지 않고 놀기만 하는데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대기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 내무 사열을 위해 침상에 정렬하고 있는데 낯선 상사가 상복이를 찾는 것이었다. 상사와 한참 말을 주고받던 상복이가 느닷없이 더플백을 주섬주섬 싸더니 그걸 짊어지고 내 앞으로 오더니 손을 쓱 내미는 것이었다. 사단 군악대로 차출됐다며 휭 하니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군악대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던 녀석이 갑자기 군악대라니?

 ‘민가 하나 없이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산속에서 힘든 교육을 받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암담해 신상명세서에 색소폰 연주를 특기라고 적었다’고 나중에 우리 부대로 놀러 와서 상복이는 말했다.

   그렇게 떠난 상복이는 이후 가끔 우리 부대에 놀러 오고는 했다. 제대를 하고 직장을 얻었다며 직장에 출근하기 전 보고 싶어 찾아왔다며 며칠간 우리  집에서 가을걷이를 도와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복학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하느라 서로 잊고 지내다 십여 년이 지나 부산 출장길에 찾은 상복이와 통음을 하며 지난 정을 되새기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제대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부산에 출장 가서 전화를 했더니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그의 부인이라는 분이 암 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건장하던 녀석이 그깟 암 하나 이기지 못하고 가다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상복이가 떠나고 훈련도 없이 시간만 죽이던 어느 날 오락시간이었다.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우는 맘 아프지만 내 마음도 아프다오.

고개를 들어요 한숨을 거두어요

어차피 우리는 이제 헤어져야 할 것을.

사랑은 그런 것 후회는 말아요

기쁘게 만나 슬프게 헤어져.

그런 줄 알면서 우리 사랑한 것을

운다고 사랑이 다시 찾아올까요.   


 ‘늘 생각에 잠겨서 말도 잘하지 않고 심상찮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뭔가 큰 고민이 있는 것 같다’는 한 동기 녀석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탈영할 것 같다는 말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 같았다. 친한 친구가 떠나 허전하고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괜한 오해를 부를 수 있겠다 싶어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명랑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백골 교육대는 이름만큼 그렇게 힘들거나 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가 많이 고팠다. 은색 둥그런 알루미늄 식기에 밥과 국, 밥 위에 얹어주는 김치가 전부였지만 어느 진수성찬 못지않게 맛이 있었다. 그러나 양은 늘 부족했다. 점심이나 저녁 배식 때는 눈치 빠른 교육생은 줄을 서서 가끔 국을 한 그릇 더 타 먹기도 했다. 모래가 씹히곤 하던 미역국을 더 타 먹기 위한 몸싸움이 치열했지만 거기에 끼지는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식당 바로 옆 개울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식기를 닦았다. 재수가 없는 날은 식기를 닦고 올라오다가 기간병에게 잡혀 기간병 식기를 닦아야 했다. 기간병 식기는 훨씬 정성 들여 닦아도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정강이를 걷어차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럴 때는 닦은 식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유혹도 느꼈지만 꾹꾹 눌러 참고 다시 냇가로 달려가곤 했다.

  식기를 닦고 개울에서 올라오면 취사병들이 잔반통을 씻을 병사들을 잡기도 하고 물을 떠 올 사역병을 모으기도 했다. 물이나 설거지 사역이 끝나면 누룽지를 주었기 때문에 이들 사역에는 줄을 서려고 병사들은 몰려 다녔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부대 뒤 작은 개울로 가서 양치질을 하고 발을 닦고 양말을 빨았다. 위에서는 새까만 땟국물이 나오는 양말을 빨고 아래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양치질을 했다. 그래도 아무도 더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식당으로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밥을 더 타 먹으려고 돌로 식기를 바깥쪽으로 움푹 들어가게 쳐서 배식구로 들이 미는 녀석들이 있었다. 취사병은 씩 웃으며 식기 밑바닥을 배식구 바닥에 탕탕 쳐서 밥을 퍼주곤 했지만 그래도 녀석들의 식기 바닥 쳐내는 짓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밥주걱으로 밥을 깎아내는 것이 칼로 살을 베는 것 같이 아프더라는 녀석까지도 있었으니 먹는 게 뭔지...

   일요일 점심은 훈련의 일환이라며 건빵으로 때워야 했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뒤늦게 입대한 형같은 교육생이 있었다. 그는 금방 건빵을 다 먹어 치우고 아직 반도 먹지 못하고 있는 내게 늘 건빵을 좀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건빵을 주면서도 얄미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음에는 또 주나 봐라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손을 내밀 때마다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또 주게 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교육대에서는 병기계를 맡았는데 가끔 점호 시간이면 병기계 사수가 일을 빙자해 행정반으로 불러내곤 했다. 한 번은 그가 걸리지만 말고 PX에 가서 먹고 싶은 걸 사 먹으라고 했다. PX출입은 훈련병에게는 엄격히 금지된 행위였지만 점호를 받고 있을 때라 들킬 염려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구경도 할 수 없는 걸 혼자 먹기 미안해 과자 몇 가지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점호가 끝난 내무반으로 들어가 바로 옆 자리 두 녀석에게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모두가 잠들었을 때쯤 모포를 뒤집어쓰고 소리 나지 않게 과자봉지를 뜯어 녀석들과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불침번을 서던 녀석이 다가와 물었다.

 “야 너거들 뭐 묵노? 나도 좀 도.”

 “먹긴 뭘 먹는다카노. 아무 꺼도 안 먹는다.”

 “야 그러지 말고 그거 쫌 팔아라. 돈 주께”

 “없다. 다 먹었다.”

 그 이후로 녀석을 만날 때마다 그 모습부터 떠올랐다. 녀석도 날 볼 때마다 그 모습을 떠올리겠지... 미안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한참 후 자대에서 녀석을 만났을 때였지 교육을 받고 있을 때는 부끄러운 줄도 창피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백골 교육대에서는 4주간 훈련을 받았다. 1월 하순부터 3월 중순까지 교육대에서 보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기합이나 구타는 거의 없었고 군기를 잡을 때는 기합 대신 팬티 바람을 시켰다. 한 밤중에 '빤쓰 바람으로 집합’ 소리가 들리면 팬티만 걸치고 연병장으로 뛰어나가야 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연병장에서 양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노라면 온 뼈마디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팬티바람을 끝내고 내무반으로 들어가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큰거리던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기분이 아주 좋아지곤 했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도 야외훈련을 했다. LMG 기관총 사격훈련이었다. 방아쇠를 잡은 손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에는 몇 cm 두께로 남의 살을 붙인 것 같았지만 표적지는 정확히 맞출 수가 있었다. 귀청을 때리는 엄청난 크기의 연발 총소리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렸다. 교육대 인근 도로와 연병장은 눈이 조금이라도 쌓여서는 안 된다며 눈이 그칠 때까지 계속 쓸라고 했다. 쏟아지는 눈을 쓸면서 이 눈이 쌀가루나 밀가루면 좋겠다는 녀석은 있었지만 눈 오는 날 애인과의 데이트나 첫눈의 설렘을 말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툴툴거리며 눈을 쓸 따름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야외 훈련을 하고 있었다. 모두 웃통을 벗고 키 가까이 파진 호 안에 들어가 서로를 호 밖으로 밀어내는 훈련이었다. 이어진 호 안에 수류탄, 호 밖에 수류탄. 교관이 ‘호 안에 수류탄’ 하면 호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고 ‘호 밖에 수류탄’ 하면 호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호 안팎은 내리는 눈으로 진흙탕이 되었고 온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10분간 휴식시간에는 전원이 함께 노래를 불러야 했다. 교관은 눈물을 쥐어짜는 노래만 골라서 시켰다. 고향의 봄으로 시작한 노래가 오빠 생각, 어머님 은혜에 이르면서 모두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울음은 곧이어 통곡으로 변했다. 온몸에 가득 묻은 진흙은 다 어떻게 씼어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목욕탕도 샤워장도 없었는데...

   유격훈련은 늘 PT체조로 시작해 PT체조로 끝난다. PT체조가 힘든 것은 외쳐야 하는 구호 때문이다. 하나, 둘, 셋... 외치던 구호를 마지막에는 외치지 않아야 하는데 이걸 꼭 큰 소리로 외치는 멍청한 녀석은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절망감이란... 틀리는 녀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PT체조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인 군 생활을 할 부대를 배치받았다. 교육대 동기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23 연대였다. 23 연대는 곧 철책에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병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대로 가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는데 사단 주임상사가 나를 찾는다고 했다. 고향에서 같이 입대한 친구의 친척이라는 그는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내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주임상사는 이것저것 묻다가 ‘너 내 친구 동생이구나’ 하면서 아주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사단 사령부로 빼주겠다고 하면서 그러려면 돈이 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필요한 돈은 빌려주겠다고도 했다. 말단 소총 소대에서 근무하고 싶다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소총 소대에 가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느냐’며 큰돈 들이지 않고 편안한 사단 사령부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며 거듭 권하고 또 권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말단 소총 소대까지 갈 겁니다’라고 하고는 그 자리를 나왔다. 고향 친구는 그 주임상사 덕분인지 사단 사령부 취사장에 배치되었다.

   군번이 내 바로 뒤였던 친구는 고모부가 현직 군단장이라고 하면서 자기 덕분에 군번이 바로 앞인 나도 좋은 곳으로 갈 테니까 두고 보라고 했다. 자기만 좋은 곳으로 뺄 수가 없기 때문에 앞 뒤 군번을 같이 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도 말단 소총 중대로 배치를 받았다. 군단장 빽도 사단 주임상사의 빽을 넘지 못하는 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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