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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an 23. 2020

그 시절 설날에서 보름까지

설은 가슴 콩닥거리며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이었다. 동짓날 팥죽을 먹고 나서부터 아침에 잠이 깨면 할머니에게 설이 몇 밤 남았느냐고부터 물었다. 새 옷과 새 양말, 새 운동화, 그리고 세뱃돈이 그렇게 설을 기다리게 했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짐한 먹을거리와 뭔가 들뜬 분위기가 가슴을 뛰게 하고 그토록 기다리게 했을 것이다.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가 장에 갈 날만 기다렸다. 장날인데도 어머니가 장에 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왜 장에 안 갈까’ 초조해 지기까지 했다. 장 날은 더디 오기만 했고 닷새를 기다리기는 참 힘든 일이었다. 설을 앞두고 장에 간 어머니가 올 시간이 지나서도 오지 않으면 아주 안달이 났다. 동구 밖으로 나가 어머니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렸다. 마침내 아랫마을 모퉁이를 돌아오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면 냅다 달려가 장보따리부터 빼앗았다. 무거운 장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내달려도 힘든 줄을 몰랐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끄를 때면 가슴이 콩닥거리기 까지 했다.

보따리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내 새까만 양복과 알록달록한 양말, 까만 운동화, 그리고 제수용품들이었다. 그때부터 설날까지는 참 시간이 더디게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께 설날이 몇 밤 남았느냐고 물어야 했다. 기다리던 설날 전날 밤이 되면 새 옷과 새 양말, 새 운동화를 머리맡에 곱게 개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들었다가 깨면 늘 아침이었는데 이 날만은 자다가 몇 번씩이나 잠에서 깨어 머리맡에 곱게 개어놓은 것들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을 하고는 했다. 그래도 설날 아침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방안은 평소와  달리 촛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고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제사상 차릴 음식을 준비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아랫목에 자리 잡고 앉으면 형제들이 둘러서서 세배를 드렸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난 세배 안 받아도 된다’ 하면서도 늘 웃으며 자리에 앉곤 했다. 금방 친척 아이들이 와서 세배를 드리고 나면 할머니와 아버지가 세뱃돈을 나누어 주었다. 세뱃돈을 받으면 부리나케 큰 집으로 작은 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다. 세뱃돈을 주지 않고 대신 콩강정이나 한과를 나눠주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지만 어른들은 애써 모른 체했다.

세배가 다 끝나고 제사를 모실 때는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온몸을 덜덜 떨며 제사를 지내야 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한동안 서있노라면 발은 떨어져 나갈 듯 시렸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때만큼 어른이 부러울 때가 없었다. 그런 중에도 절을 하면서 장난을 치고 킥킥거리다가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장난을 멈추지는 않았다. 

설날 아이들의 제일 큰 관심사는 세뱃돈이었다. 아버지는 제사가 끝나면 우리 형제들에게 세뱃돈을 별도로 더 나눠주곤 했다. 필요한 것 외에는 절대로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설날만은 달랐다. 아이들은 세뱃돈을 군것질이나 장난감 사는 데에 모두 썼다. 우리 동네에는 과자 가게가 없어 설날에는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이것을 노려 ‘또 뽑기’라는 과자를 떼어 와 파는 아이들이 있었다. ‘또 뽑기’ 한 통을 다 팔면 거의 반통 가까이 살 돈이 남는다고 자랑을 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구미가 당겼지만 아버지가 혼을 낼 것 같아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세뱃돈으로 큰 맘먹고 멋진 크레파스를 샀다. 예쁜 비닐 상자 안에 든 크레파스에는 크레용이 24개나 들어있었고 싸구려 크레용과는 달리 색이 아주 잘 칠해져 미술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세뱃돈으로 과자를 사 먹지 않고 크레파스를 샀다는 걸 알게 된 할머니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세뱃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그 비싼 크레파스와 학용품을 다 샀다고 말을 보태기까지 했다.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부터는 더욱 모범생이 되어야 했다.

설이 끝나고 정월 대보름까지는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전통적인 풍습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화라도 입지 않을까 하여 꼭 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정초에는 집집마다 정화수 그릇을 올려놓은 상을 마당 한가운데에 두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그 상 앞에 엄숙하게 앉아 뭔가를 정성스레 빌곤 했다. 우리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천지신명께 빌었을 것이었다. 소 날에는 외양간 위 다락에 콩을 볶아서 얹어 놓아야 했다. 이날은 콩 볶은 것을 맘껏 먹을 수 있었지만 마구간 다락의 콩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용 날인가에는 새벽에 일어나 이웃집 부엌으로 달려가 솥뚜껑을 열어 놓아야 했다. 반드시 다른 집 남자아이가 솥뚜껑을 열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큰 집 부엌은 늘 내 차지였다. 설이 지나고 첫 번째 용 날이 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잠을 깨웠다. 추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큰 집으로 달려가 솥뚜껑을 큰 소리가 나게 열면 큰 집 형수가 나와 칭찬을 해주곤 했다. 정초에 듣는 칭찬은 새벽 일찍 일어나 귀찮은 일을 한 것을 보상받고도 남을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집안 부엌에는 흠이 없는 쌀만 골라 담은 ‘용 단지’라는 항아리를 구석에 두었고 안방 실겅에는 정갈한 쌀을 담고 문종이로 덮어 실타래로 묶은 삼신할미를 위한 바가지를 얹어 두어야 했다. 이 용 단지나 삼신할미 쌀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여름철 쌀이 다 떨어지면 어머니는 할머니께 드릴 밥을 짓기 위해 이 용 단지 쌀이나 삼신할미 쌀을 헐었다. 어머니가 용단지 쌀이나 삼신할미 쌀을 헐 때는 늘 가슴이 아팠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가 큰 부자라면 저 신성한 쌀을 헐지 않아도 될 텐데 싶었던 것이다. 대청마루 안방 문 위에는 문종이를 여러 장 겹치고 그 위에 나무를 대고 실타래로 묶은 신주를 모셨다. 아이들 백일이나 돌잔치 때 이 신주 앞에 미역국과 하얀 쌀밥을 가득 담은 상을 차려 놓고 할머니는 아이 건강하고 큰 인물 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정월 대보름날이 가까워 오면 마을 풍물패들이 동네 집집을 다니며 지신밟기를 했다. 풍물패는 집집마다 다니며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마당을 돌며 흥겹게 놀다가 부엌으로, 마구간으로, 정낭(화장실)까지 두루 몰려다니면서 귀신을 내쫓는 의식을 올렸다. 이럴 때 형편이 닿는 집은 돈을 내놓고 형편이 못 되는 집이라도 막걸리는 내왔다. 집집을 돌면서 풍물패들은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다. 아이들과 구경하던 할머니, 아낙들까지 덩달아 신이 나 덩실덩실 따라다니며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대보름날을 맞는다. 대보름을 앞두고 어른들은 붉은색 팥 바위 흙을 파와서는 동네 어귀에 뿌리고 솔가지를 단 금줄을 쳤다. 집집이 사립문 앞에도 팥 바위 흙을 뿌리고 금줄을 달았다. 보름날 이른 새벽에는 마을 입구 당나무와 성황당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남자 어른들만 참석을 하여 날이 밝기 전에 지내는 것이어서 제사 지내는 모습을 아이들은 볼 수는 없었다. 대보름날은 정말 신나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에 온 가족이 동탯국과 함께 찰밥을 먹으며 대보름날을 열었다. 마을 청년들은 대보름날 새벽에 여인네 복장을 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찰밥을 얻으러 집집이 다녔다. 대보름날 여러 집에서 밥을 얻어먹을수록 복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었다. 대보름날은 해가 지기 전 이른 시간에 국수발처럼 길게 살라고 칼국수를 저녁밥 대신 먹어야 했다.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은 아낙네들은 마을 앞, 동산에 올라가 동녘에 떠오르는 달을 보며 절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 대보름날 저녁이면 남자아이들은 숯불을 깡통에 담아 빙빙 돌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논두렁을 태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마을 앞산 꼭대기로 올라 가 불깡통을 돌리며 놀다가 깜깜한 밤이 되면 마른나무 가지를 잔뜩 모아 큰 불을 피우기도 했다. 

대보름 다음날은 귀신 날이었다. 이날 밤에는 귀신이 신발을 신고 가지 못하도록 신발을 방에 들여놓고 자야 했다. 귀신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했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일어나면 아침이었다. 일어나기 무섭게 눈썹이 세지는 않았나 거울부터 들여다보곤 했다. 어머니나 누나는 잠든 동생들 눈썹에 떡쌀 가루를 잔뜩 칠해 놓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 동생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귀신 날 오후에는 겨우내 가지고 놀았던 아끼던 연을 하늘로 날려 보내야 했다. 정성 들여 만들고 겨우내 가지고 놀아 정이 들대로 든 연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은 정말 아깝고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에 귀신이 붙기 때문에 날려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해 겨울을 보내고 또 새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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