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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Feb 26. 2020

스스로와 다짐한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오월이라고는 해도 바깥바람은 차가웠다.

“바람이 차요. 가까운 여관에 들어가 몸도 녹이고 눈을 조금 붙이기로 해요.”

“아니 춥지 않아요. 여기 대합실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요.”

“겁먹지 말아요. 나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요. 날이 밝아지면 바로 나올 거예요.”

한참을 승강이를 하다가 어쩌지 못하고 따라 들어온 그녀는 방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이불을 덮고 좀 누우라는 말에 아니라는 단호한 말투가 너무 결연해 혼자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인 거 같았는데 이미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그녀는 앉은자리에 쪼그린 그대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살금살금 욕실로 가서 소리 나지 않게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그녀가 화들짝 눈을 떴다. 이불도 덮지 않고 춥지 않았느냐는 말에 그녀는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불을 개어 한쪽 벽에 기대어 놓고는 그 이불에 등을 기대고 오늘 하루 무엇을 할까를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무엇에 그렇게 끌렸는지 그날 이후 거의 매일 그녀를 만났다. 학교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그녀의 퇴근시간을 기다렸고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녀를 만나고 열흘쯤 지났을 무렵 창경원으로 밤 벚꽃놀이를 갔다. 아직 밤바람이 꽤 쌀쌀한데도 창경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조용히 옆에서 걷던 그녀가 인파에 놓칠까 그랬는지 내 소매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모른 체했다. 한참을 소매만 잡고 걷던 그녀가 내 팔을 두 손끝으로 잡았다. 가슴은 더욱 쿵덕거렸지만 끝내 그녀 손을 잡지는 못했다.

우리 둘의 집은 같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녀 집보다 더 멀리 있었다. 그녀가 버스를 내릴 때 같이 내렸다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가사에 보태 쓰세요’. 그녀가 준 돈으로 버스비를 내고 거스름돈을 그녀에게 건넸을 때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하던 모습이 집에 가는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행주산성을 가고 있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에 부딪쳤고 손은 수시로 내 손가락에 닿았다. 어느 순간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살며시 내 손가락을 잡았을 때 머리는 먹먹하고 가슴은 요동을 쳤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이내 깍지를 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깍지를 풀지 않았다.

그녀와 단 둘이서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함께 여행을 한다면 가능할 일이었다. 때마침 어린이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해야 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었다, 음흉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생각이나 음흉한 마음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남녀가 함께 밤을 새운다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냥 밤을 함께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라면 당연히 의심을 할 것이었다. 방법은 하나, 밤기차를 타면 될 일이었다. 그래 밤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조용한 바닷가를 가고 싶다고, 끝없이 펼쳐진 평선을 함께 보고 싶다고 말하자. 밤새 달리는 기차를 타고 멀리 남해나 동해로 가자고  말해보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믿어줄 것이다. 진심을 알아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눈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망설이고 있었다. 둘이서 함께 하고 싶어서일 뿐이라고, 단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일 뿐이라는 간절한 눈망울을 그녀는 믿었던 것일까? 자신이 스스로에게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지켜 주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그녀가 알아채기라도 했던 것일까?

기차 안은 사람들로 크게 붐비지 않았다. 차가운 밤바람에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공기가 포근히 감싸주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기에 참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기차는 역마다 멈춰 섰는데도 이내 종착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밖은 아직 깜깜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얇은 봄옷만으로 대합실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차가운 공기였다. 난감했다. 용기를 내야 했다. 오해를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추위에서 지켜주어야 했다. 깜깜한 밤으로부터도 혹 모를 불량배로부터도 지켜야 했다. 몸을 덥힐 따뜻한 방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멀찌감치 구석자리부터 찾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불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내가 멀찌감치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내 옆으로 오라는 눈짓을 했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이 얼핏 그녀의 얼굴을 스치는가 하더니 오래지 않아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어깨를 안아 내 옆 자리 이불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그녀는 가만히 안겨왔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있다가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안긴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를 어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려고 이 멀리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둘이서만 있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믿음을 주어야 했다. 그냥 그 자세 그대로 있고 싶었고 그대로 있었다.

섬으로 가는 배를 탔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자그마한 섬이었다. 오월의 햇살 아래 섬은 노란 유채꽃과 막 피기 시작한 보리가 뒤덮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해서였을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섬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배에서 내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이내 섬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자그마한 섬이었다.

돌아오는 배는 한산했다. 승객은 모두 선실 안에 있어 배 밖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롯이 뱃전에서 둘이서만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금빛 햇살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내 옆에 서 있던 그녀는 이따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윽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둘이는 어떤 때보다 많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그늘을 찾게 한 한낮의 햇살보다 뜨거웠고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내는 시원한 바람보다 싱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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